“성공 신화 계속 써 가겠다”
“성공 신화 계속 써 가겠다”
  • 남장현 
  • 입력 2007-04-26 16:59
  • 승인 2007.04.26 1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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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짱’여성 챔프 김주희 인터뷰
당초 약속시간보다 10여분 빠른 지난 4월17일 오후 5시50분, 몸에 착 달라붙는 검정색 트레이닝복에 흰 모자를 눌러쓴 자그마한 체구의 한 여학생이 땀내음 물씬 풍기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스프리스 거인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혹시 다이어트 운동을 하러온 건 아닐까’하고 궁금했던 찰라, 수줍은 표정으로 배시시 웃으며 관장실 문을 연 그 여학생. 바로 IFBA 주니어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 김주희(21·중부대)였다. 이 사람을 누가 12전 10승1무1패의 화려한 전적을 지닌 파이팅 넘치는 복서로 생각할까. “제가 주부거든요. 살림 좀 하느라 늦었네요. 정말 미안합니다.”
악수를 청하자 곧바로 작은 손을 내밀어 힘주어 꽉 잡는다. 아프다. 역시 그녀의 직업은 속일 수 없었다. 한 시간여의 즐거운 데이트를 풀어본다.



◆ ‘미녀’도 좋지만 ‘복서’가 더 좋아

“글쎄, 예쁘다는 말도 싫지는 않은데 그래도 전 선수라는 소리가 더 좋은데요.”

요즘 국내 스포츠계는 미녀 바람이 드세다. 성황리에 최근 막을 내린 여자 농구, 배구에 이어 남성 스포츠의 전유물로 여겨진 투기 종목 복싱까지
여풍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160cm, 49kg의 탄력있는 몸매와 귀여운 외모를 지닌 김주희가 있다.

‘외모지상주의’라는 혹평도 있겠지만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모두에게 인지상정이다. 김주희는 도무지 ‘복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 여느 20대 평범한 아가씨들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김주희는 “미녀도 좋지만 이전에 복싱 선수”라는 것을 누차 강조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샌드백을 두드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투쟁심 넘치는 프로다. 심지어 등산할 때 ‘북서’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복서’로 보였다니 알 만하다.

“글러브를 낀 뒤 링 위에 올라가면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기분이에요. 좀 이상하죠?”

천하무적으로 군림하던 한국계 미국인 멜리사 세이퍼를 꺾고 2004년 12월 세계 챔피언에 첫 등극한 김주희는 작년까지 3차 방어에 성공한 뒤 오는 5월초 국내(장소 미정)서 열릴 4차 방어전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일요일만 제외하고, 주 6회씩 트레이닝복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하
루 6시간 이상 맹훈련을 거듭하고 있다.

줄넘기를 하고, 샌드백을 정신없이 두드리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스파링은 한체급 높은 파트너를 정해 주 3회씩, 30라운드를 채우고 있다고 했다. 이마저도 훈련 시간을 줄인 것이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훈련 양을 줄일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부상 탓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결국 뼈 조각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지만 이번엔 왼쪽다리 인대가 말썽이었다.

작년 4월 쓰나미(일본)와 경기를 마친 뒤 새로이 몸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가락 부상을 입었다.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작은 염증이 생겼는데 그대로 방치하다 뼛속까지 고름이 찼다. 결국 수술을 받고, 깁스를 4개월씩이나 해야 했다. 재활치료 과정까지 합하면 총 6개월여에 달한다.

“정말 죽고 싶었어요. 부상을 숨기고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한 제가 바보였지요.”(김주희)

“운동을 그만두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심각했어요.”(정문호 관장)

그러나 김주희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섰다. 훈련을 재개한 것은 지난 3월 중순. 이제 80% 가량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이를 극구 부인하고, 아직 70%에도 미치지 않았다는 정 관장이지만 그나마 짧은 시간 내 이 정도까지 몸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선수 본인의 강한 정신력이 없었으면 불
가능한 일이었다고 회상한다.


◆ 효녀 김주희, 팬들께 늘 감사

김주희는 자신의 집안 얘기를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근래 언론과의 인터뷰를 꺼렸던 것도 이에 기인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복싱 선수로 다루기보다 개인 프라이버시를 들추며 가여운 사람으로 만드는 게 싫다고 했다.

이미 다 알려졌다시피 김주희는 아버지(김산옥)와 단 둘이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언니는 타국에서 공부중이고, 모친은 별거중인 상태에서 부친이 병상에 있기 때문에 병수발과 함께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한다. 인터뷰에 앞서 자신을 ‘주부’라고 소개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프로 데뷔 때부터 8년 이상 김주희를 지도하고 있는 정 관장은 ‘효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효녀가 따로 없습니다. 이것저것 정신없을 텐데 운동을 저토록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비록 제가 데리고 있는 제자지만 자랑스럽습니다.”

한때 육상 스타를 꿈꿨던 김주희는 스스로 ‘배고파서 복싱을 시작했다’고 입문 계기를 설명했다. 전형적인 헝그리 복서다. 운동 자체에 대한 매력도 있었지만 정말 살고 싶어서 복싱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솔직히 넉넉하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링 위에서 불의의 펀치를 맞고 사망한 복싱 선배 김득구 선수가 가엾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오히려 자기가 좋아하던 일을 원 없이 했으니 가장 행복했던 사람 중 한명이라면 지나칠까요?”

김주희는 매달 140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고 있다. K-1이나 프라이드 등 이종격투기를 비롯, 메이저 종목이 아닌 비인기 종목에 주로 투자하는 스포츠 용품업체 스프리스에서 매달 나오는 후원금이다.

같은 회사로부터 연봉 5억원을 후원받는 최홍만 등과 비교해볼 때 발치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그래도 김주희는 늘 감사해 한다. 국내 여자 복싱선수 중에선 최상위에 가까운 대접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챔피언 타이틀을 가진 국내 여자 선수를 모두 살펴보더라도 이처럼 고정 수입이 있는 선수는 김주희뿐이다. 부상으로 인해 작년보다 전체 연봉이 30% 가량 삭감되긴 했지만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스프리스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용품도 넉넉하고,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봉급도 주시니 고맙죠. 이런 도움에 보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그러나 무엇보다 김주희가 가장 감사하게 여기는 부분은 팬이다. 자신을 예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팬들이나 정통 복싱 팬들 모두가 소중하다.

소극적인 플레이가 아닌 저돌적인 공격을 하는 ‘인파이터’를 고집하는 것도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함이다. 경기 후 얼굴이 유독 부어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라나.

“격투기 인기가 대단한 것은 다른 종목이 갖지 못한 박진감 때문이라 생각해요. 저도 한때는 일본으로부터 격투기 제의를 받고 고민했지만 이왕에 정통 복서로 남기로 결정했으니 복싱의 진수를 보여줄 겁니다.”

김주희가 첫 세계 챔프에 올랐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여성 복서의 숫자는 남자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지만 지금은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있는 여성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현재 국내에 세계 타이틀을 가진 여자 선수는 김주희까지 7명에 달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었다. 김주희처럼 국내 챔피언을 거쳐 세계 무대로 도전한 케이스가 있는가하면, 국내 단계를 제대로 밟지 않고 곧장 세계 타이틀에 도전해 벨트를 획득한 경우도 있다. 심지어 달랑 서너 경기만 치르고, 챔피언에 등극한 경우도 있으니 김주희로선 조금 억울할 법도 하다. 그녀는 이를 ‘일장일단(一長一短)’의 원칙으로 내다봤다.


◆ 챔프? 단계 조금씩 밟는 게 중요

“제가 처음 복싱을 시작했을 때, 남자가 아닌 여자이기 때문에 더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잖아요. 마찬가지 맥락으로 다른 챔피언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을 유도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거죠. 하지만 솔직히 국내에도 좋은 선수가 많은데 여기서 일단 우승을 차지해 실력을 검증받은 뒤, 단계를 거쳐 세계무대에 도전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즉, 국내를 찍고 세계로 진출하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일 수 있다는 의미다. 당연한 얘기다.

김주희는 챔피언으로서 자신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위치에 와 있는 상황.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선수로서 다음 목표는 통합 타이틀을 획득해보고 싶어요. 제가 소속된 IFBA뿐만 아니라 WBA 등 같은 체급 챔피언과 맞붙어 이기고 싶습니다.”

결코 불가능하지 않은 꿈. 김주희의 복싱후배 IFBA 미니멈급 챔피언에 올라있는 손초롱(20)은 작년 12월 WBA 타이틀까지 획득해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녀가 부상으로 잠시 쉬고 있는 동안 있었던 일이었다.

일단 김주희는 선수 생활을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이어가고 싶어 한다. 복싱이란 스포츠가 언제고 그만둬야할 상황이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더 하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다만 물러날 때가 왔을 때, 미련없이 떠날 수 있도록 현재에 충실한다는 생각.

은퇴 후에는 국제 심판과 해설자를 그려보고 있다. 물론 대학 강단에도 서 보고픈 욕심이 있다. 김주희는 영어와 일어를 독학해 어느 정도 회화가 가능하다.

“은퇴 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고민될 정도라니까요. 그 중 국제 심판은 꼭 이뤄보고 싶어요. 축구계에 임은주 심판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지켜봐 주세요.”

명확한 목표와 비전을 갖고 한걸음씩 차근차근 이뤄가는 ‘복서’ 김주희. 그녀의 성공 스토리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인기 시들해지자 후원금 ‘뚝’ 끊겨

한국 복싱이 위태롭다. WBC 페더급 지인진과 IFBA 김주희를 비롯해 남녀 선수 통틀어 세계 챔피언을 8명이나 보유하고 있지만 심각한 푸대접이 계
속되며 유망주들을 떠나보내고 있다.

‘헝그리 복서’는 모두 옛말이다. 이제 배고프면 복싱말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편이 낫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김주희처럼 정말 배고파서 선택한 경우는 극히 드문 반면, 다이어트나 대학 진학 등 종전과는 다른 이유로 복싱을 택한 경우가 많아졌다. 현역 복서로 활동하다 운이 좋으면 격투기로 전향하지만 대부분 관련없는 직업을 택하게 된다.

이유는 한 가지, 돈 때문이다. 궁극적 목표는 아니지만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돈은 꼭 필요할 수밖에 없다. 과연 돈에 초연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국내 세계 챔피언들만 예로 들어도 적게나마 보수를 받는 선수는 김주희가 유일하다. 지인진도 일정한 수입이 없다. 해설자로 데뷔하는 등 여러 일을 해보지만 벌이는 시원찮다.

터무니없이 적은 대전료도 문제다. 타이틀 방어전 단계가 높아질수록 대전료는 높아져야하나 오히려 떨어지는 게 한국 복싱의 현실이다. 프로모터들은 “밑지는 장사”라면서 수십년씩 활동한다. 이해못할 일이다. 최근 ‘대전료 착복 문제’가 불거진 것도 괜한 얘기가 아니다.

수입보다 높은 KBC 라이선스 갱신료도 예외는 아니다. 돈이 없는 선수들은 백만원대 후반의 금액을 충당하기 위해 빚까지 지고 있다. 열악한 체육관과 운동 시설은 말할 것도 없다.

예의 화려함과 명성을 되찾기 위해, 한국 복싱계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할 시점에 놓여 있다.

남장현  yoshike3@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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