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곳곳에 남겨진 가우디의 흔적을 좇는 일만으로도 바르셀로나의 하루는 경이로울 만치 빠르게 지나간다. 내가 알던 바르셀로나는 실제의 반도 채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 여행객들은 나와 정반대편에 서 있다. 가우디와 피카소, 성가족성당과 람블라 거리가 바르셀로나의 전부인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도시의 절반을 눈 뜨고 놓쳐버릴 수밖에 없다.
가우디와 피카소의 도시
축구를 빠뜨린 바르셀로나 기행은 그 반대의 경우처럼 겉핥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니, 바르셀로나 입장에서는 어쩌면 그보다 더욱 무례한 방문일지도 모르겠다. 축구를 모르고 이 도시를 거쳐간다는 것은 바르셀로나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바르셀로나에서만큼은 축구가 하나의 문화이자 역사이며 거주민들의 존재증명인 까닭이다.사실 바르셀로나는 한국인들에게 꽤 친숙한 도시다. 매년 이 도시를 찾는 엄청난 수의 한국 여행객들은 바르셀로나를 통해 여러 가지 기억과 지식을 환기시킨다.
도시 곳곳에 스며있는 가우디의 향취와 피카소 박물관, 성가족성당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은 바르셀로나를 찾는 사람들이 가진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친근함을 전한다. 유명 예술가들의 이름으로 바르셀로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한 치도 배반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르셀로나가 친숙한 더 커다란 이유는 예술과 무관한 사람들의 이름 덕분이다. 황영조와 사마란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바르셀로나를 기억하게 만든 당사자들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도시 남쪽 몬주익 산의 언덕을 내달리며 일본인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따낸 황영조는 바르셀로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이름이다.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몬주익과 함께 기억되는 이유는 이 지역 출신의 IOC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국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사마란치가 고향에서의 올림픽 개최를 적극 지원한 덕분이다. 이 두 이름은 바르셀로나를 좀더 즐겁게 기억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연상작용의 출발점이다.
애칭 바르샤로 통해
바르셀로나에서 축구팀 바르셀로나FC(이하 바르샤)의 존재는 일종의 종교라 해도 무방하다. 유럽에서는 바르샤라는 애칭으로 더욱 친숙한 이 축구팀은 올림픽이나 가우디보다 더욱 뜨겁게 카탈루냐인들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킨다. 바르샤의 인기는 지역 안에 갇혀있지 않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의 발길을 좇다보면 대부분 바르샤 박물관을 거치게 된다. 우리나라 여행 안내서들이 이곳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온갖 박물관 중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 숫자를 자랑하는 곳이 바로 이곳 바르샤 박물관이다. 이곳이 가우디, 피카소 박물관의 방문객 수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사실은 그 존재가치와 중요성을 스스로 입증하는 대목이다.
한국인 방문객들이 이 공간의 존재 여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바르셀로나를 다녀간다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바르샤의 역사는 카탈루냐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바르샤의 ‘누 캄’이 성전처럼 떠받들어지는 것도 역사에 얽힌 이유가 있어서다. 저 험난하던 프랑코 독재 시절, 카탈루냐인들이 ‘마드리드’를 향해 목청을 높일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 바로 이곳 누 캄이다. 카탈루냐 깃발을 내걸지 못하게 한 프랑코도 축구장에서만큼은 숨통을 열어주었다. 그리하여 정권의 특혜와 지원 속에 막강 전력을 구축한 레알 마드리드를 향해 민족의 울분을 실어 공을 내지르던 선수들이 뛰어다니던 이곳.
10만 수용 누캄 경기장 ‘웅장’
10만이 넘는 인파를 감당할 수 있는 웅장한 규모와 그 안을 가득 메운 카탈루냐인들의 함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장관이다. 내로라하는 유럽의 축구스타들이 누 캄 그라운드에 서는 것을 어린시절 일생일대의 꿈으로 여겼던 일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바르샤의 적청색 줄무늬 유니폼은 어린 소년들에게 한없는 동경의 대상이다. 그만큼 유럽 축구계에서 바르샤와 누 캄이 갖는 위상은 대단하다. 한편으로 바르셀로나는 여전히 분리독립운동을 진행 중인 카탈루냐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험난했던 프랑코 시대를 지나 자치권을 획득했지만 독립 주권을 갖기 위한 움직임은 여전히 계속된다. 민족은 있되 나라는 없는 카탈루냐 인들에게 축구장의 푸른 그라운드는 자신들의 존재를 마음껏 과시할 수 있는 전장이다.
비록 FIFA(국제축구연맹)의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독립된 축구협회를 통해 매년 자신들만의 A매치를 치를 정도로 자긍심도 강하다. 이같은 저간의 사정은 바르샤가 ‘적군’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리그 우승이라도 차지할 때면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변하는데서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마치 독립을 쟁취하기라도 한 듯 뜨거워지는 것이다. 매년 한 차례 누 캄에서 열리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리그 홈 경기는 이 도시 최대의 연례행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만이 넘는 ‘성전’의 좌석은 모두 매진되며 킥오프 직전 경기장 전체는 도시와 축구팀의 상징색으로 빨갛고 파랗게 물든다.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
일상에서는 마드리드와 여전히 활발한 교류가 오가지만 축구에서만큼은 마드리드가 여전히 최대의 적인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샤의 경기가 ‘클래식 더비’로 불리며 세계 최고의 라이벌 전으로 불리는 것은 괜한 호들갑이 아니다. 바르샤 팬들은 레알 마드리드를 홈으로 불러들여 경기를 가질 때마다 화려한 오프닝 이벤트와 압도적인 카드섹션으로 분위기를 제압한다. 팬들은 ‘Catalunya is not Spain’이라고 적힌 팻말을 손에 들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계에 타전하는 노력도 잊지 않는다. 바르샤는 마드리드에 대항하는 카탈루냐인들의 가장 자랑스러운 무기인 셈이다. 이처럼 바르샤는 그들의 모토인 ‘More than a club’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한 축구팀 이상이다. 카탈루냐인들의 수난사가 고스란히 투영된 상징적 존재이며 이를 위해 카탈루냐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친선대사로서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바르샤가 주최하는 각종 예술 경연대회는 한때 저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가 젊은 시절에 작품을 출품했다가 낙방한 일이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전 세계의 많은 축구팬들이 언제든 꼭 한 번 찾아보고 싶은 축구장으로 누 캄을 꼽는 이유도 바르샤가 갖는 특별한 위상 덕분일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클럽의 주주회원인 ‘쏘시오(Socio)’에 가입시킨 것도 바르샤가 아니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바르셀로나를 처음으로 방문했던 2003년 12월, 내 마음을 빼앗아 간 것은 축구팀이 아니라 가우디였다. 미처 예상치 못했던 가우디의 공습에 어찌할 줄 모르던 나는 한참 동안 시내를 누비느라 예정했던 바르샤 박물관 방문을 놓쳐버렸다. 경기 전날 잠시 들러 경기 입장권만 사둔 채 구엘 공원이며 카사밀라 등을 오가면서 생각도 못한 바르셀로나의 독특함에 빠져버린 것이다.
호나우딩요 인기 ‘절정’
승리의 갈증에 허덕이던 바르샤는 역시 부진에서 허우적대던 셀타 비고를 불러들여 모처럼 만의 승수 쌓기에 나섰다. 경기를 압도한 바르샤는 호나우딩요를 축으로 선전했지만 터키 국가대표 골키퍼인 뤼스튀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동점골을 허용, 1-1 무승부로 경기를 마치고 말았다. 누 캄을 찾은 3만여 관중은 골문을 지키던 선수가 가랑이 사이로 상대의 슛을 흘려주자 머리를 무릎에 파묻은 채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이로써 리그 중위권을 벗어나지 못한 바르샤의 팬들은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썰물처럼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중해의 찬 바람이 누 캄의 빈 의자 6만여 개를 거칠게 내치고 있었다.한동안 바르샤의 기치를 높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히바우두마저 대표팀과 바르샤 사이에서 주춤하다 인심을 잃고 쫓겨난 지 오래였다.
풋내기 호나우딩요와 사비올라는 아직 카탈루냐인들의 신임을 받지 못하던 2003년 끝물의 일이다. 게다가 새롭게 선출된 구단주는 팀 재정난을 이유로 바르샤의 자존심으로 통하던 텅 빈 유니폼 앞면을 광고 모집에 내걸겠다고 야단이었으니 팬들이 팀을 향해 잠시 등을 돌린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홉 달이 지난 뒤에 다시 바르셀로나를 찾았을 때는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바르샤는 다시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팀 성적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내가 첫 방문을 마치고 돌아간 직후인 2004년 벽두다. 이적시장이 열린 1월, 유벤투스에서 중앙 미드필더 다비즈를 영입한 바르샤는 이후 연승에 연승을 거듭한 끝에 리그 2위로 시즌을 마쳤다. 레알 마드리드보다 높은 순위로 시즌이 끝나자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기쁨은 대단했다.
더욱이 모두가 애타게 찼던 구세주의 등장은 도시 전체를 흥분시켰다. 프랑스 파리 생제르망에서 입단한 뒤 공회전을 거듭하던 호나우딩요, 그의 발길이 레알 마드리드를 침몰시키는 순간 바르셀로나와 바르샤는 다시 함께 솟아올랐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호나우딩요의 몫이다. 팀 성적이 나아지고 호나우딩요의 역할이 늘어날수록 바르샤 팬들의 기대는 점점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급기야는 호나우딩요가 요한 크루이프의 뒤를 이을 절대 영웅으로 등극할 것이라는 믿음도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크루이프가 레알 마드리드의 제의를 거절했듯이 호나우딩요가 세계 최고 부자 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입단 제안을 단칼에 내치고 바르샤에 안착한 사실은 ‘우상화 작업’의 재미있는 시발점이다. 과장이 섞여있기는 하지만 호나우딩요가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구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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