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히딩크의 ‘본가’
영웅 히딩크의 ‘본가’
  • 정리=구명석 
  • 입력 2006-04-12 09:00
  • 승인 2006.04.1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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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독일 월드컵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전국민들은 또한번의 ‘신화창조’를 기대하면서 눈과 귀를 독일쪽으로 열어놓고 있다.G조에 속해있는 우리나라는 아트사커로 세계 최강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 프랑스, 압박축구의 대명사인 스위스와 상대해야 한다.물론 토고도 만만하지 않지만 16강 진출을 위해서는 유럽축구를 넘어야 한다. 따라서 본지는 유럽축구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축구전문 칼럼니스트인 서형욱씨의 <유럽축구기행·살림출판사>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암스테르담 방문은 두 번째다. 두 달 전 벨기에를 거쳐 이곳에 들렀을 때는 챔피언스리그를 봤었다. 워낙 시간이 없어 경기장만 스쳐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별로 다를 것은 없다. 암스테르담을 거쳐 프랑크푸르트, 로테르담을 거치는 여정 끝에 다시 암스테르담을 통해 리버풀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 도시를 찬찬히 뜯어볼 기회를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날은 PSV에인트호벤의 리그 경기가 예정되어 있어 서둘러야 한다. 공항에 연결된 기차역에서 에인트호벤으로 가는 열차표를 끊은 뒤 플랫폼으로 달렸다. 여유부리다간 짧지 않은 여행이 초반부터 엉클어질 것이다.머릿속에만 갖고 있던 에인트호벤 방문계획을 실행에 옮긴 건 전적으로 여세진 씨 덕분이다. 축구협회 직원인 그는 축구협회와 히딩크 재단의 연계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유소년 선수들을 이끌고 에인트호벤으로 날아와 있었다.

마침 숙소에 빈 방이 있다는 이야기와 타향에서 맥주 한 잔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끌려 프랑크푸르트행 일정을 쪼개 에인트호벤 여행을 끼워 넣었다. 신세지는 일에 익숙해지니 스스로 염치도 없지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새로운 도시를 방문한다는 생각에 에인트호벤이 가까워질수록 슬슬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마 에인트호벤은 유럽의 중소도시 중에서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도시가 아닐까. 월드컵이 끝난 뒤 히딩크 감독과 이영표, 박지성 선수가 이 도시에 둥지를 틀면서 매일같이 매체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따지자면 우리에게 정말 친숙한 이름은 도시 이름으로서의 에인트호벤이 아니라 축구팀으로서의 에인트호벤일 것이다. 전자회사 필립스가 후원하는 이 팀의 정식 명칭은 PSV에인트호벤. 이미 1980년대 허정무 선수가 활약한 일이 있어 축구팬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팀이다.

이영표 ‘맹활약’ 박지성 ‘슬럼프’

에인트호벤에 도착하니 이미 해는 져버린 뒤다. 네덜란드의 1월은 영국과 다르다. 대륙의 추위를 우습게 봤던 내게 두터운 점퍼를 뚫고 스미는 으스스한 한기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다. 깜깜한 역사 앞에 서서 덜덜 떨며 시계를 보니 경기 시간이 고작 30분밖에 남질 않았다. 10분 정도 지나니 가로등 너머로 비행선 모양을 한 필립스 스타디움의 외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난 가을 모나코에서 두 선수가 맹활약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다시 떠올라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런 날, 경기가 0-0으로 끝나면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려도 객석을 떠나기가 쉽지 않겠지. 온갖 쓸데없는 생각으로 추위를 떨궈내다보니 어느새 경기장 입구에 다다랐다.

이 무렵 한국 선수들은 아직 팀에서 완전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다.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활약으로 팀에 기여하는 이영표가 무난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면 박지성의 경우 슬럼프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시기였다. 성질 급하기로 이름 난 PSV에인트호벤의 서포터들은 때맞춰 박지성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부진한 선수를 힐난하는 네덜란드 팬들의 반응은 박지성을 더욱 위축시켰고 슬럼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을 홈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겠다”며 박지성 보호령을 내렸다는 보도가 나온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이날 홈경기에서 박지성은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히딩크 감독의 심정이야 이해할 만하지만 멀리서 찾아온 방문객의 입장에서는 서운함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아약스와 매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1위 쟁탈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부진에 빠진 선수를 무턱대고 기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매 경기가 결승전 같은 분위기다보니 리그 최약체 팀 중 하나로 꼽히는 FC즈볼레와의 경기마저도 쉬운 승부가 아니다. 홈팬과 선수들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경기장에 들어선다. 사실 네덜란드 리그의 가장 큰 특징은 강팀과 약팀의 전력차가 상당히 크다는 점이다. 아약스, PSV에인트호벤, 페예노르트의 경우 즈볼레와 같은 약팀을 상대할 때면 기록적으로 점수차를 벌여놓은 뒤에야 경기를 끝낸다. 한 달 전에 열린 볼렌담 전에서 PSV에인트호벤는 무려 7-0의 완승을 거뒀다. 그러므로 즈볼레 전 역시 정상적인 경우라면 부담 따위 가질 필요 없는 쉬운 승부지만 한 경기 덜 치른 라이벌팀 아약스와 승점이 같은 상황이라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폭설속의 ‘완승’

취재석에 자리를 잡은 덕에 추위가 더하다. 빽빽이 들어찬 관중들 틈에서 경기를 본다면 옆 사람의 체온 덕분에라도 쌀쌀한 기운이 조금은 가실 테지만 사방이 뻥 뚫린 취재석은 그런 ‘인정넘치는’ 방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될 즈음 어디선가 온기가 흘러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싶어 위를 쳐다보니 지붕 아래쪽에 나란히 설치된 히터가 추위를 뚫고 온기를 쏘아내리고 있다. 이 추위에도 경기장을 찾아준 3만여 팬들에 대한 구단 측의 세심한 배려라고 생각하니 기특한 조처라는 생각이 든다.경기는 예상대로 PSV에인트호벤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 진행된다. 약팀을 만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듯이 상대를 몰아친 PSV에인트호벤은 전반에만 세 골을 몰아치며 3-1로 하프타임을 맞이했다.

킥오프 무렵부터 조금씩 내리던 눈은 골이 터질 때마다 양이 늘어나더니 전반전이 끝난 뒤에는 엄청난 폭설로 바뀌었다. 15분가량의 하프타임이 끝날 즈음,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먹고 좌석으로 돌아오니 그 새 그라운드가 온통 하얀색으로 변해버렸다.선수들이 후반전에 나서기 위해 입장하면서 남긴 발자국만이 희미하게 초록빛을 띠지만 그마저도 이내 하얗게 덮여버릴 만큼 눈발이 거세다. 결국 주심은 후반전을 오렌지색 공으로 진행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휘날리는 눈발을 맞으면서도 선수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매섭다. 하지만 하얀색 땅 위를 오가는 오렌지색 축구공을 보고 있으려니 아무래도 축구 경기를 보고 있다는 느낌은 쉽게 들지 않는다. 더군다나 선수들이 힘껏 내찬 공은 바닥을 몇 미터도 채 구르지 못하곤 멈춰선다. 승부는 역시 PSV에인트호벤의 것이다. 후반 들어 헤셀링크와 볼란텐이 각각 한 골씩 추가한 PSV에인트호벤은 5-1로 완승했다. 경기는 끝났지만 폭설은 쉽게 멎지 않는다.

경기장 앞에서 두 한국 선수를 만나 짧은 인터뷰를 마칠 때까지도 눈발은 여전하다. 여세진 씨에게 신세를 질 요량으로 그가 데려온 유소년 축구팀 선수들과 함께 히딩크 재단에서 내준 버스에 올랐지만 결국 숙소까지는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숙소 입구에 가득 쌓인 눈 때문에 버스가 진입할 수 없어 숙소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차를 멈춰야 했던 것이다. 서둘러 기차를 타고 에인트호벤까지 정신없이 달려온데다 추위에 떨며 경기를 보고 또 한참을 걸어 숙소에 도착해선지 오랜만에 회포를 풀자던 여세진씨와의 약속도 지키기 어렵다.

다음날이면 또 갈 길을 가야하니 마지막 밤이 될 텐데도 두 사람 모두 반가움보다는 피곤이 앞선다. 잔뜩 꺼내놓은 맥주를 다 마시지도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PSV에인트호벤이 이날 어떻게 다섯 골을 넣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해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도시 곳곳을 둘러보고 싶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다. 결국 경기장 옆의 PSV에인트호벤 매장에 들러 기념품을 사는 것으로 에인트호벤 일정을 마치기로 했다.

용품매장 규모 작아

필립스 스타디움이라는 경기장 이름에서 보듯 PSV에인트호벤은 전자회사 필립스의 후원을 받는데, 이에 걸맞게 경기장 한켠에는 필립스 전자제품 매장이 상당히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용품 매장이 경기장 반대편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다 길을 잘못 들어 이 매장을 우연히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온 뒤에야 PSV에인트호벤 축구팀 매장에 도착했다. 전자제품 매장에 비하면 절반 정도 크기인 게 섭섭하기는 하지만 더 아쉬운 것은 구비한 물품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다는 것.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아약스나 페예노르트 매장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지난 20년 간 리그 3위권 밖으로 한 번도 밀려난 일이 없을 만큼 꾸준한 성적을 내는 팀 치고는 아쉬운 규모다. 매장 한켠에는 한국 선수 두 명의 사진을 위쪽에 나란히 붙여둔 게 보인다.

반가운 생각이 들어 유니폼을 팔고 있는 점원에게 “한국 사람들도 많이 사가는가?”하고 물었더니 쌜쭉한 표정으로 “가끔 오긴 하는데 유니폼은 안사더라”고 답한다. 등에 선수 이름이 박힌 유니폼을 사려면 우리 돈으로 10만 원은 줘야 하니 ‘티셔츠’치고는 꽤나 비싼 금액이긴 하다. 레플리카를 입는 문화가 여전히 낯선 한국 정서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긴 나도 기껏해야 값싼 물품 몇 종류 사고 말 생각이었으니 그저 씩 웃고 나올 수밖에. 기차에 몸을 실은 뒤에도 왠지 모르게 뒤통수가 아리다. 마케팅을 위해 한국 선수들을 사왔다는 PSV에인트호벤 팬들의 조소와 아직은 이를 불식시키지 못한 우리 선수들의 입지가 괜히 마음을 어지럽게 만든다. 하지만 히딩크가 어디 그럴 사람인가.

히딩크의 눈에 든 수준의 선수라면 유럽에서 허투루 세월만 보내다 귀국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멀지 않아 우리 선수들은 좋은 성과를 낼 것이고 스스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아약스가 어린 선수들을 잘 길러서 파는 팀이라면, PSV에인트호벤은 나이 든 선수들을 데려와 더 나은 선수로 키워 되파는 데 익숙한 팀이 아닌가. 두 선수가 PSV에인트호벤을 거쳐 빅 리그에서 맹활약하는 호마리오, 호나우두, 반 니스텔로이, 케즈만, 로벤 등의 선례를 따르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언제든 에인트호벤을 다시 찾을 땐 이러한 기대가 무모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만날 수 있길 빌어본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구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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