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런던 연고의 팀들이 거세게 상승세를 타면서 영국 대표 축구 도시의 이름표를 거두려 애를 쓰고는 있지만 아직 맨체스터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바로 맨체스터에 둥지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이 도시를 연고로 하는 맨체스터 시티도 만만찮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니 1980년대까지 리버풀이 보유하고 있던 최고 축구도시의 명패가 맨체스터의 차지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중에서도 맨체스터를 상징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위세는 대단하다.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엄청난 규모의 팬들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축구계의 제국주의적 통치자로 군림하게 하는 밑바탕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지난 2003년, 맨체스터가 유럽 클럽 최강자를 가리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의 유치도시로 결정된 것은 그런 점에서 꽤 자연스러운 일이다.맨체스터에서 벌어질 2002~2003 시즌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중계하기 위해서다. 월드컵 붐 덕택에 달아오른 축구 열기는 MBC가 한국 방송 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의 현지 생중계를 단행하기로 결정하는데 큰 힘을 실어줬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영국 출장길에 오르게 된 나는 기대감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평생 텔레비전으로 지켜보고 말겠지 싶었던 빅 이벤트를 현지에서 직접 경험하게 되었으니 기대가 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장을 푼 버밍엄은 맨체스터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영국에서는 런던을 제외하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다. 목적지와 가깝지 않은 이곳을 베이스 캠프로 삼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특수로 인해 맨체스터 시내의 숙소가 만원 사태를 빚은 데다, 이런 ‘대목’을 놓칠 리 없는 맨체스터 상인들이 각종 물가를 ‘바가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정보 때문이다.
외국팀간 경기도 ‘만원사례’
영국 땅에서 이탈리아 팀들끼리 결승전을 치르는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리다니. 우리 관점에서 보자면 관중 동원은 물론이고 붐 조성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역시 유럽은 다르다. 이탈리아 명문 AC밀란과 유벤투스가 맞붙은 이 해의 결승전도 변함없이 만원 관중을 기록했고 수많은 언론의 집중조명 속에 성공적인 피날레를 장식하게 된다. 중계 장비를 사전에 점검하기 위해 점심을 먹자마자 경기 장소인 맨체스터로 출발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인 올드 트래포드 주변은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분주하다.
1960년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명장’ 매트 버스비 경의 이름을 따 붙인 ‘매트 버스비 길’을 따라 들어가니 거대한 올드 트래포드 경기장의 외관이 눈에 들어온다. 미적 감각의 외양과 오랜 역사가 어우러져 특유의 멋스러움을 자랑하는 이 건축물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팀 중의 하나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엔지니어와 프로듀서가 장비를 점검하는 동안 뒷자리에서 장비를 점검하던 30대 초반의 동유럽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경기 전날, 경기장에서 해설자가 해야 할 일은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경기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 것이 전부다). 옆자리에서 다음날 중계를 준비하던 이 남자는 조지아(그루지야) 방송국의 해설자 로베르다.
이번이 다섯 번째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현장 중계라는 그는 다소 무뚝뚝한 표정으로 제 할 일에 열심이었지만 내가 “칼라제는 참 좋은 선수다”라며 자국 선수를 칭찬하자 이내 친근한 표정이 되어 말문을 열었다. 축구계에서는 한국만큼이나 작은 나라인 조지아 출신이라선지 자국 선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것에 아주 신이 난 표정이다. 로베르와의 대화를 이끌어 낸 칼라제는 이탈리아 명문 AC밀란에서 활약 중인 수비수다. 칼라제는 1년 전 괴한들에게 동생을 납치당해 해외토픽란을 장식하기도 했던 조지아의 대표적인 축구선수다. 안그래도 궁금하던 차라 칼라제 동생의 근황을 물었더니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맨유 팬 메가스토어 ‘북적’
칼라제 이야기를 꺼낸 데 대한 답례일까. 곧이어 로베르는 꽤나 반가운 질문을 던진다. “차붐은 요즘 뭐하고 지내나” 월드컵 때 한국에 가진 못했지만 차범근은 여전히 기억한다는 그는 “차붐은 유럽컵을 거머쥔 대단한 선수였다”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칼라제에 반색하던 로베르처럼 나 역시 금세 얼굴에 화색이 돈다. 유럽인들에게 차범근은 한국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특히 서른 살이 넘은 유럽 남성들에게 차범근은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유럽인들을 만날 때마다 ‘아마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인은 차범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래서다. 특히 축구장에서 만나는 유럽인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곧장 차범근의 안부를 묻는다. 경기장을 둘러보니 상암 월드컵 경기장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여러 차례 증축 공사를 진행한 구장답게 경기장이 전체적으로 불균형하게 이뤄져 있다.
그리고 6만8천여 석의 큰 규모답지 않게 아담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이채롭다. 경기장 안쪽에서는 여러 군데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케이블 채널 MU텔레비전이 계속 방송된다. 스태프들이 중계 장비를 미리 점검하는 동안 경기장 곳곳을 돌며 중계를 위해 간단한 취재를 마친 뒤 해질 무렵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일행이 찾아간 곳은 맨유의 공식 용품 매장인 ‘메가 스토어’다. 구장 한쪽에 위치한 이곳은 겉에서 보기보다 훨씬 큰 규모를 자랑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넓은 크기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2년 전에 방문한 아스날, AS로마의 공식 숍에 비하면 10배는 족히 넘을 만큼 거대한 규모. 100평 넘는 공간이 유니폼에서 시작해서 목욕타월, 침대커버, 팬티, 칫솔 등에 이르기까지 맨유 마크가 선명한 상품으로 가득하다. 심지어는 아기 턱받침, 사탕과 초콜릿, 무스와 로션 등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상품이 즐비하다. 경기 당일에는 상점이 문을 열지 않을 뿐 아니라 바쁜 일정으로 틈을 낼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이런저런 물건을 들춰보던 내겐 그 규모 자체가 이미 하나의 볼거리인 셈이다. 하지만 값이 만만치 않은지라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입가의 침을 닦은 뒤 매장을 빠져나왔다. 유럽축구의 상술에 혀를 내두르며 일행과 함께 버밍엄으로 돌아왔다.
올드 트래포드의 추억
중계를 위해 올드 트래포드에 다시 도착한 것은 경기 당일 오후다. 드디어 결승전. 킥오프는 아직 세 시간도 넘게 남았지만 경기장 주변은 벌써 인산인해다. 이탈리아에서 바다를 건너 날아 온 AC밀란과 유벤투스의 팬들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열성팬들의 틈에서 양 팀의 이름을 목청껏 부르며 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돋우고 있다. 중계석에 앉아 큐 사인을 기다리는 동안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월드컵과 달리 경기장 전체가 양 팀의 응원단으로 반반씩 채워져 있는 이곳은 엄청난 소음과 진동으로 어지럽다.
경기 전 대개의 예상은 유벤투스의 우세를 점쳤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전망은 결승전이 지루한 경기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팀들 간의 경기라는 편견 탓이기도 하지만 이는 역으로 두 팀 모두 최강의 수비력을 갖췄다는 방증 덕분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전후반을 0-0으로 마친 경기는 연장전을 거쳐 결국 승부차기로 이어졌다. 경기의 치열함은 승부차기에도 이어졌다. 양 팀 골키퍼들은 명성에 걸맞는 선방을 거듭했고 그때마다 양쪽 응원석의 관중들은 탄식과 환호를 번갈아 뱉어내며 몸을 떨었다. 유럽 최고의 클럽을 가리는 시즌 최종전의 결과를 승부차기에 내맡기는 것은 어쩐지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승부는 갈리기 마련. 셰브첸코의 슛이 골망을 가른 AC밀란은 리그 라이벌 유벤투스를 가까스로 누르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AC밀란의 안첼로티 감독은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컵을 거머쥐는 영광을 누렸고 같은 팀의 네덜란드 국가대표 시도르프는 아약스, 레알 마드리드에 이어 AC밀란에서도 우승 메달을 목에 걸어 사상 처음으로 세 개 팀에서 유럽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날만큼은 어쩔 수 없이 패자일 수밖에 없는 유벤투스 팬들은 AC밀란 팬들의 전세버스가 서 있지 않는 휴게소를 골라 잠시 한숨을 돌린다.
이전 휴게소에서 손에손에 맥주병을 움켜쥐고는 노래를 부르던 AC밀란 팬들과 달리 유벤투스 팬들은 얼른 화장실만 이용하고는 이내 휴게소를 떠나고 만다. 조금 우습지만, 승패의 냉혹함이 남아있는 휴게소의 풍경은 제3의 도시에서 벌어진 챔피언스리그 결승의 여운을 부족함 없이 보여주는 것이어서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영국까지 날아와 고배를 마시고 돌아가는 유벤투스 팬들의 뒷모습에서 자꾸 1년 전 대전 월드컵 경기장의 기억이 되살아났다면 너무 잔인한 표현이려나. <다음호에 계속>
정리=구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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