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힘’이 독립투쟁 불렀다
‘축구의 힘’이 독립투쟁 불렀다
  • 구명석 
  • 입력 2006-03-07 09:00
  • 승인 2006.03.0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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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축구는 국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따라서 모든 국가는 축구에 사활을 걸고 있다.2006 독일월드컵은 국가간의 한판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승패가 곧 국력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실제로 그간 축구로 인해 국가간의 전쟁으로까지 번질 조짐을 보였던 사례도 적지 않다. 본지는 코앞으로 다가온 2006 독일월드컵의 또다른 ‘신화창조’를 기원하면서 특별기획코너를 마련한다.축구의 발자취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더듬은 세계적 축구전문 칼럼니스트 사이먼 쿠퍼가 쓴 <축구 전쟁의 역사 | 원제 Football against the Enemy (이지북 출판사)>를 발췌, 연재한다.

<편집자주> 베를린을 출발하여 빌니우스까지 가는 기차 여행은 22시간이나 걸린다. 빌니우스에는 백만 명 가량이 살고 있었는데 15세기에 건설된 시 중심부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20세기에 형성된 교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도시 전체가 폐허였다. 그러나 소련과 비교하면 리투아니아는 여전히 부유한 나라였다. 뿐만 아니라 소비예트 공화국들 중 최초로 독립을 쟁취한 나라이기도 했다. 다른 발트해 국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도 곧이어 독립을 쟁취했고 미국 월드컵 대회 예선에 출전한 상태였다. 라트비아 대 리투아니아, 그리고 에스토니아 대 스위스의 경기는 이 지역에서 결코 치러진 적이 없는, 본선 참가국을 가리는 열띤 예선전 두 경기를 관전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왔다.

홈팬들 횃불 들고 행진

빌니우스에 도착해서 나는 먼저 사주디스 운동 사무실을 찾았다. 사주디스는 리투아니아 제1당이었고 총선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내가 영국에서 온 축구 저널리스트라고 밝히자 그들은 나를 데려가 당수 안드리우스 쿠빌리우스(Andrius Kubilius)를 접견하도록 했다. 당시엔 서방 사람이라면 누구나 중요 인사처럼 여겨졌다. 축구와 농구가 독립 투쟁에 아주 중요했다고 쿠빌리우스가 소개했다. 잘기리스 빌니우스(Zalgiris Vilnius)가 러시아팀과 시합을 갖고 나면 홈팬들은 경기장에서부터 행진을 하곤 했다. 그들은 횃불을 들고 노래를 불렀다. 시 중심부에 이르면 그들은 진압봉으로 무장한 군대와 맞닥뜨려야 했다(리투아니아 사람들은 그 곤봉을 ‘바나나’라고 부른다). 1980년대 후반까지 이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민족주의 운동은 이런 게 고작이었다. 고르바초프가 권좌에 오르고 사람들이 좀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서야 스포츠는 자신의 역할을 정치에 넘겨주었다.

“사주디스가 힘을 얻게 되자 스포츠는 부차적인 지위로 내려앉았죠.” 쿠빌리우스의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소련 사람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스포츠 경기에서만큼은 자기팀을 응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련 선수들은 결코 호응하지 않았지만 잘기리스 선수들은 경기장 남쪽 끝에 있는 가장 떠들썩한 리투아니아인 홈팬들에게 손을 흔드는 걸 잊지 않았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유럽’에 호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항상 유럽 세계의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다수 서방 사람들이 리투아니아라는 국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다. 국가의 존재가 알려져야만 무역이 시작될 수 있고 여행객도 찾아올 수 있다. 만일 러시아 군대가 리투아니아를 다시 침공한다고 해도 서방 대중이 이 나라를 알아야만 서방 정부도 뭔가 행동해야 할 압력을 더 느낄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스포츠가 도움이 될 수 있다.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며칠 전 리투아니아 농구팀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한 달 동안 리투아니아는 전세계적으로 수도 없이 방송 전파를 탔고 이는 란트베르기스 대통령이 1년 간 수행한 외교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나는 빌니우스를 떠났다. 리투아니아는 라트비아와 어웨이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마트베주스 프리스마나스(Matvejus Frismanas)의 폴크스바겐 밴을 얻어 타고 리가(Riga, 라트비아의 수도)로 향했다. 프리스마나스는 엄청난 부자인데다 발트해의 칼립소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축구를 아주 좋아했고 ‘국가 대표팀 감독’이라고 영어로 찍은 그럴싸한 명함이 있었고 사실상 자기가 리투아니아팀 관리자나 마찬가지라고 허세를 부렸다. 그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한 사람은 프리스마나스의 처남이었고(그는 수학 선생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리투아니아인 축구 기자였다.

프리스마나스와 그의 처남은 유태인이었다. 그들은 나 역시 유태인이란 사실을 곧 알아냈다. 처남인가 하는 사람이 이디쉬어(중세 고지 독일어 방언에 러시아어, 폴란드어, 헤브라이어가 섞여서 생긴 언어로 헤브라이 문자를 쓴다)와 독일어, 영어를 섞어가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 조상과 형제자매가 살고 있는 이 땅을 결코 망각할 수 없습니다. 리투아니아의 대지 말입니다. 우리를 이곳에 살게 한 건 독일인이 아니라 바로 리투아니아인이었습니다.” 프리스마나스는 마카비 빌니우스(Maccabi Vilnius)를 후원하고 있었다. 이 클럽은 2차대전 전까지는 유태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럼 지금은? “지금요? 유태인은 오직 돈일 뿐이죠.” 가는 길에 우리는 각자 조용히 자기 일을 했다. 기관총을 든 수비대원이 라트비아 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리투아니아 “정의구현 운동”

내가 가벼운 감기에 걸리자 동행한 사람들이 몹시 걱정을 했다. 우리는 리가호텔로 곧바로 차를 몰았다. 리투아니아 대표팀이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우리는 대표팀의 건강 상태를 책임지고 있는 의사를 찾았고 의사는 내 동행자들만큼이나 나를 염려해 주었다. 프리스마나스와 처남은 내게 리투아니아팀 진짜 감독 알기만타스 리우빈스카스(Algimantas Liubinskas)와 인터뷰를 할지 물어왔다.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나를 안심시켰다. 리우빈스카스가 프리스마나스의 사업 파트너라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그러나 신문에 이 사실을 싣지는 말아달라”고 그들은 부탁했다.

리우빈스카스는 자기 방에서 나이 든 장비 담당자와 함께 MTV를 보고 있었다. 그는 “인디애나 심판 학교(Indiana Refereeing Course)”라고 쓰인 셔츠를 입고 있었다. 리투아니아는 어떤 팀이었을까. “리투아니아인은 기질이 그다지 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작은 나라가 히틀러-스탈린 밀약(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이 비밀리에 체결한 상호불가침 조약. 이로써 두 나라는 폴란드를 분할하고 소련은 발트 3국과 핀란드를 점령했다. 1941년 6월 22일 바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이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공격해 동부전선이 형성됨으로써 무효화되었다)이후 가졌던 최초의 중요 경기(북아일랜드와 벨파스트에서 가진 경기를 말함)에서 어떻게 2대2의 경기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북아일랜드가 못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전혀 몰랐습니다. 우리에겐 그들의 시합을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리투아니아? 그게 어디 있는 나라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영국의 축구 스타일은 측면 돌파에 이은 공중 센터링 공격 전술인데 점핑과 헤딩이 중요한 기술로 부각됩니다. 우리는 이런 높이를 바탕으로 하는 축구를 ‘이층에서 하는 경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비를 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두 골이나 넣긴 했지만 말입니다.” 리우빈스카스는 리투아니아축구연맹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월드컵 대진표를 보면 북아일랜드를 Airija로 에이레를 S. Airija로 적고 있다.

두 단어는 아일랜드와 남부 아일랜드를 뜻하는 리투아니아어다. 발트 3국에서 개최된 최초의 월드컵 경기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서방 상징물에 대한 열망은 라트비아축구연맹에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형 로고를 성조기와 함께 관중석 한쪽에 설치했다. 리투아니아 선수 중에는 오스트리아 빈과 디나모 키예프(Dynamo Kiev)에서 활약하고 있는 해외파 선수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었다. 반면 라트비아는 해외파 선수들이라고 해봐야 겨우 핀란드의 일베스 탐페르(Ilves Tampere)나 폴란드의 롬차(Lomza) 그리고 침울한 이름의 그라니트(Granit)에서 뛰고 있는 정도였다. 라트비아가 1점을 선취했고 전반 종료까지 리드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이전경기에서 약체 몰타에 패한 실력이 어디로 간 건 아니었다.

곧이어 리투아니아가 동점골을 넣었고 곧이어 안드리우스 테레스키나스(Andrius Tereskinas)가 득점을 해 2대1로 승리했다. 이로써 리투아니아는 50년이 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한 쓰라린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기자간담회에서 리투아니아는 이 시합이 발트3국의 ‘정의를 구현하는 중대한 경기’였고 그래서 그토록 ‘무례하고 난폭한’ 시합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나는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고, 묄러-닐센이 다른 방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아프리카 가나팀이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자기가 ‘제3세계’ 라고 말하는 것이 거슬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에스토니아 “고지식한 경기는 노”

이틀 후 난 에스토니아와 스위스의 대전을 보기 위해 탈린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플로라 탈린(Flora Tallinn)은 리그 4위 팀에 불과했는데도 대표 팀 선수 거의 전원이 그 팀 소속이었던 것이다. 다른 팀에서 선발된 선수는 겨우 두 명뿐이었다. 에스토니아는 불합리한 기준으로 대표 팀을 선발한 것 같았다. 수수께끼의 해답은 바로 민족 감정이었다. 반면 운동장에서 연습하고 있는 스위스 팀은 일치단결하고 있었다.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에 심지어 영어를 하는 사람도 섞여 있었지만 말이다. 경기는 예상대로였다.

스위스는 쉽게 득점을 했고 팬들은 카우벨(cow-bells)을 울리며 악취탄을 터뜨렸다.1980년대 소련 팀과 마찬가지로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소련은 페어플레이를 했지만 중요한 시합에서는 항상 졌다. 실력도 없는데다 러시아의 근성 부족까지 지닌 에스토니아는 형편없는 팀일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한 선수가 유난히 돋보였다. 미드필더 마틴 레임(Martin Reim)은 키가 겨우 5피트(약 150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했지만 발트해의 카를로스 발데라마(Carlos Valderrama)라고 할 만했다. 훈련이나 테스트를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에스토니아로선 고지식한 경기를 펼쳤고 이게 바로 패배의 원인이라는 게 경기를 지켜본 기자들과 감독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구명석  gms75@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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