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대전을 하게 되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현재까지 유럽 축구사상 가장 치열했던 접전은 네덜란드와 독일의 경기다. 그 모든 것은 함부르크에서 시작되었다. 1988년 유럽선수권대회 네덜란드와 서독의 경기는 ‘축구전쟁’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당시 네덜란드 감독 리누스 미헬스나 수비의 핵 쿠만의 말처럼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오렌지군단 3총사’로 칭해진 훌리트, 반 바스텐, 레이카르트가 맹활약한 네덜란드는 준결승에서 서독과 맞닥뜨렸다. 도를 넘어선 태클과 신경전이 난무했던 이 경기에서 네덜란드는 반 바스텐의 결승골로 2대1의 승리를 거두며 74년 월드컵 결승의 패배를 깨끗이 설욕했다.
선수단이 귀국하자 이 차분하고 근엄한 국가는 광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전인구의 60%가 넘는 900만 시민이 거리로 나와 우승을 축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로 가장 커다란 인파였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네덜란드를 5년이나 점령하고 있었고 네덜란드인들은 대부분 저항운동에 가담했다. 물론 함부르크의 그날 밤은 전쟁이 끝나고도 수십 년이 지난 후였다. 독일인들은 여전히 가슴에 독수리가 새겨진 옷을 입고 있었다. 네덜란드 선수들은 저항군이었고 독일인들은 나치 점령군이었다.서독전에 승리해 큰 고비를 넘긴 네덜란드는 결승에서 당시 소련을 제압하며 국제대회 ‘무관의 설움’을 풀었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총력전’
1990년 네덜란드와 독일은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고 2라운드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두 팀은 월드컵과 유럽국가선수권전에서 늘 격돌한다. 이탈리아 월드컵 16강전에서 다시 만난 두 팀은 프랑크 레이카르트(전 네덜란드 감독)와 펠러(현 독일 감독)가 볼썽 사나운 실랑이를 펼쳐 라이벌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밀라노에서 독일은 2대1로 승리한다. 그러나 그걸로 끝난게 아니었다. 레이카르트는 펠러에게 트리핑 반칙을 범하며 옐로 카드를 받았다. 이로 인해 다음 경기에 출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감정이 격앙된 펠러는 프리킥때 네덜란드 골키퍼에게 달려들다 부딪쳤고 이때 레이카르트가 펠러에게 침을 뱉었고 그를 쫓아가더니 또다시 침을 뱉었다.
두 선수는 결국 동시에 퇴장 당했는데 펠러는 이유가 분명치 않았다. 혼란 속에서 펼쳐진 경기에서 독일은 2대1의 승리를 거뒀고 ‘압박축구’ 대유행을 이끌며 월드컵 우승을 차지해 통독을 자축했다. 침을 뱉은 이 사건은 심한 오해를 가져왔다. 일부 네덜란드 선수들은 펠러가 그에게 인종주의적인 발언을 했다고 주장한다. TV 화면은 첫 파울이 있고 나서 펠러가 레이카르트에게 소리치는 장면을 분명히 보여준다. 펠러는 “왜 파울을 하는 거냐.”고 따졌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모두 나치나 다름없다고 보는 이 무지막지한 추론의 가장 큰 결함은 바로 레이카르트 자신이 이 사실을 부인한다는 데 있다.
그는 펠러가 인종주의적인 발언을 한적이 없다고 말한다. 아마 그는 소동을 가라앉히고 펠러를 보호하려고 그랬는지도 모르겠다.(많은 네덜란드 선수들과 달리 레이카르트는 이런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그는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펠러를 비난하는 네덜란드 선수들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덜란드 언론은 이 사건을 면밀히 조사했고 레이카르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한번 보세요. 정말 웃기지 않아요.”
상대팀에 신경질적인 반응
이 말은 일종의 신성모독이었다. 독일인들은 인종주의자들이고 네덜란드는 선이라고 주장하려는데 레이카르트가 이 모든 사태를 한판의 코미디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가 독일인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대다수 네덜란드령 서인도(1975년에 수리남으로 독립했다)인들에게도 이 말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아니나 다를까 그 사건으로 인해 다음번 네덜란드와 독일의 경기는 훨씬 더 긴장된 것이었다. 1992년 6월18일 고텐부르크에서 유럽국가선수권을 놓고 두 팀은 다시 격돌했다.
독일을 대표하는 마태우스가 부상으로 결장했고 대신 앤디 몰러(Andy Moller)가 투입되자 <더 텔레그라프>는 가지고 씹기에 함량 미달이라고 투덜거렸다.네덜란드인 1,000만명이 경기를 시청했고(이는 네덜란드 TV 시청자수 최고기록이다) 울레비 스타디움(Ullevi Stadium)은 네덜란드인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독일 축구팬들은 관심을 덜 가졌다. 두 나라의 대전이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긴 했지만 그렇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는 히틀러가 침공한 유일한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경기만 벌어지면 볼 수 있는 네덜란드의 병적 흥분은 독일인들을 어리둥절케 한다. 펠러는 이런 라이벌 관계의 원인이 ‘국외자들’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병적으로 흥분하는 관중들
고텐부르크 시합에서 3대1로 네덜란드가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네덜란드와 독일의 대전은 뭔가 불가사의한 힘을 불러일으킨다. 스코틀랜드가 독립국가연합(CIS: 구소련이 해체된 후 형성됐던 15개 공화국의 느슨한 국가연합)을 3대0으로 이겨주는 바람에 독일팀과 네덜란드 팀 모두 준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덴마크, 독일은 스웨덴과 각각 준결승을 치러야 했지만 두 팀 모두 결승전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덴마크와의 준결승에서 지고 만다. 그들은 너무 오만했던 것이다.
반면 독일은 스웨덴을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하지만 덴마크에 결국은 우승컵을 빼앗기고 만다.네덜란드와 독일의 대전은 또 다시 흥분을 불러올 것이다. 1988년 이후 몇 년 동안 네덜란드는 유럽 최고의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독일은 형편없는 선수들이 활약했다. 그러나 훌리트, 레이카르트, 판 바스텐, 바우터스, 로날트 쿠만이 국제 축구계를 떠나자 독일은 네덜란드를 쉽게 이기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선수들이 독일 선수들보다 더 나은 인격체가 되려고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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