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튼-김재현, MVP급 활약
가장 눈에 띄는 선수는 현대의 래리 서튼. 서튼은 홈런(19개), 타점(68개), 장타율(0.586) 3개 부문에서 1위를 달리고 있고 타격 3위(0.312), 최다안타 10위(83개)등 도루를 제외한 공격 전 부문 톱 10안에 진입해 있다. 전통적으로 거포들이 강세를 보였던 홈런, 장타율 등에 서튼이 강한 모습을 보인 건 이례적인 일. 서튼은 키 182cm에 몸무게 93kg으로 외국인선수 치고는 왜소한 몸집이지만 연일 홈런포를 쏘아 올리고 있다.서튼의 장타 비결은 바로 선구안. 서튼 스스로 “난 홈런타자가 아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파워 히터는 아니지만 정교한 방망이 솜씨로 승부하고 있다. 특히 좌타자이지만 좌완투수에 강하고 유인구에 거의 속지 않을 정도로 빼어난 선구안을 자랑한다. 서튼과 함께 좌타자 ‘투톱’ 체제를 형성한 선수는 SK의 김재현.
김재현은 ‘최고 타자’ 의 척도인 타율(0.330)과 출루율(0.464)에서 1위를 달리고 있고 장타율 2위(0.553), 최다안타(87개), 홈런(15개), 타점(58개)에서 각각 4위에 랭크되어 있다.올 초 SK와 4년간 20억 7,000만원의 FA(자유계약선수) 계약을 맺은 김재현은 시즌 초반 주전들이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며 팀이 하위권에서 허덕일 때 홀로 분전하며 몸값을 톡톡히 했다. 김재현의 ‘나홀로 분전’을 밑거름으로 SK는 집단 부진에도 5∼6위를 근근히 유지하다 최근 LG와 함께 플레이오프 마지노선인 4위에 진입했다. 지난 2002년 엉덩이뼈와 다리뼈를 이어주는 고관절이 썩어가는 증상인 ‘대퇴골두 무혈 괴사’ 라는 희귀병으로 선수생활을 중단하기도 했던 그로서는 화려한 부활을 한 셈이다.
‘호타준족’ 좌타자들도 가세
서튼, 김재현 이외에 공격부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선수들은 삼성의 박한이, LG의 이병규와 박용택이다. 이들의 특징은 호리호리한 체격이지만 빠른발과 민첩함을 갖춰 공수에서 두루 활약하고 있다. 거포들은 즐비하지만 기동력과 섬세함이 떨어지는 삼성에서 박한이의 존재는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다. 호화군단 삼성엔 홈런을 쳐줄 선수는 많지만 감독의 의도대로 기동력있게 움직여줄 선수는 박한이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그는 붙박이 1번 타자로서 진루해 상대 투수를 흔들며 기동력있는 팀 작전을 수행해주고 있고 수비에서도 빠른 발을 이용, 호수비로 투수들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고 있다.현재 그는 최다안타 2위(92개), 타격 8위(0.308)를 기록하며 톱타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그의 선전에 힘입어 중심타자인 심정수, 양준혁, 김한수도 상승효과를 보고 있다.한때 최하위에 처져 있다.
전성기 시절의 ‘신바람 야구’ 를 다시 선보이며 단숨에 4위로 진입한 LG에는 이병규와 박용택이 있다. 최근 10경기에서 LG는 경기당 평균 무려 7.2득점의 놀라운 공격력을 뽐내고 있고 팀타율도 0.330으로 끌어올려 시즌 평균 팀타율 0.268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톱타자 이병규는 최근 5경기에서 2홈런 등 타율 0.476(21타수 10안타) 8타점의 불꽃 화력을 뽐냈고 박용택도 5경기에서 타율 0.313(16타수 5안타)으로 공격을 주도했다. 최근 맹활약을 펼친 덕에 이 두 선수도 공격 부문 상위권에 이름을 올려놓았다.이병규는 김재현과 함께 타격 공동 1위(0.330), 최다안타 1위(96개), 타점 6위(54개)에 올라 있고 박용택도 득점 1위(61점), 도루 1위(27개), 최다안타 3위(91개), 타격 6위(0.310)에 포진해 있다. 좌타자 5인방 이외에 롯데의 정수근도 도루 2위(19개), 득점 3위(52점), 타격 10위(0.300)를 기록하며 올스타 팬 투표 1위를 차지해 식지않은 인기를 과시했다.
‘좌타자 킬러’ 좌완투수들 부진으로 더욱 상승세
그렇다면 올시즌 유독 좌타자들이 맹위를 떨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좌타자 킬러’ 역할을 해오던 좌완투수들의 부진이다. 딱 잘라말해 올 시즌에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친 좌완투수는 아무도 없다. 이런 현상은 각종 기록에도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지난해 다승왕 1위였던 레스(두산)를 포함, 다승 베스트 10 중 좌완 투수는 모두 4명이었다. 그런데 올시즌엔 다승 10위 안에 드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퀄러티 스타트와 다승 등 각종 기록의 척도가 되는 투구 이닝 수에서도 10위 이내에 드는 좌완투수도 없다. 각 팀의 좌완 선발투수들이 그만큼 오래 버텨내지 못한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다승은 물론이고 방어율, 탈삼진 등 다른 기록에서도 톱10 안에 진입한 선수를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발진은 물론이고 구원투수, 마무리 투수 할 것 없이 총체적 난국인 셈이다.그나마 두산의 이혜천만이 20위권 안에 이름을 올린 것이 전부다. 이혜천은 이닝 수에서 19위(80이닝), 방어율 9위(3.94), 다승 17위(5승)에 오른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마저도 규정 이닝을 간신히 채운 것이라 언제 순위에서 빠질지 모른다. 용병투수들도 부진하기는 마찬가지다. 캘러웨이(현대), 바르가스(삼성) 등 그나마 몸값을 하는 투수는 전부 우완투수다. 그나마 초반 그럭저럭 버티던 좌완 산체스(SK)는 성적 부진으로 퇴출됐다.
좌타자들 진화로 ‘좌타자엔 좌투수’ 큰 의미없어
좌완 투수들의 부진과 더불어 좌타자들의 ‘진화’ 도 좌타자 전성시대를 연 또다른 이유다. 그동안 ‘좌타자는 좌투수에 약하다’ 는 속설은 정설로 굳어져 왔다. 좌타자가 바라볼 때 좌완 투수가 던진 공은 궤적이 몸 바깥으로 도망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타자에게 좌완 투수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올 해 프로야구 판도에서 이같은 공식은 통하지 않는다. 좌타자들이 ‘진화’했기 때문이다. 좌타자들은 좌투수에 약하다는 전통적인 야구이론을 뒤집고 있다. 좌완투수들에 대한 좌타자의 적응도와 선구안은 갈수록 향상되고 있다. 특히 좌타자 5인방은 한결같이 큰 키와 긴 팔을 가지고 있어 바깥쪽으로 흐르는 공에도 방망이를 갖다 맞힐 능력을 키웠다. 더구나 이들은 선구안마저 뛰어나 유인구를 걸러내고 자신이 확실하게 노리는 공만 스윙하며 좋은 타구를 많이 생산해 내고 있다.
김재현은 지난해까지 왼손 투수에게 0.252로 맥을 못췄다. 그러나 올해는 다르다. 김재현은 왼손 투수를 상대로 0.359(64타수 23안타)의 타율을 유지하고 있다. 오른손 투수를 상대로 한 0.343(169타수 58안타)보다 높다. 서튼과 박한이도 마찬가지. 올해 국내에 데뷔한 서튼은 좌완 투수에게 무려 0.394(71타수 28안타), 우완 투수에게 0.304(171 타수 52안타)이다. 박한이는 좌완 투수에겐 0.351(77타수 27안타), 우완 투수에겐 0.316(187타수 59안타)이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8개 구단 감독들과 투수 코치들도 ‘그저 그런 왼손’ 보다 ‘확실한 오른손’ 투수를 선호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직 왼손타자를 잡기 위한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 투수들은 출장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도 좌타자들을 제압할 좌완투수가 당장 나오기는 힘든 실정이다. 좌타자들이 좌완투수 공략법을 속속 개발해내는 데 비해 좌완투수들은 새로운 구질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좌타자들의 활약은 더욱 빛날 전망이다.
김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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