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2인자와 친인척은 앙숙이었다”

세계사는 막후 정치사이다. 역사 이면에 가려진 막후실세들의 권력다툼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막후 정치사는 정사정사(正史)보다 훨씬 드라마적 요소가 강해 간혹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한국 현대사에 가려진 막후정치는 대통령의 친인척과 ‘킹메이커’인 정권 2인자 간에 전쟁이었다. 역대 대통령은 조직이나 관료보다 비공식 계통(친인척, 권력2인자)을 통해 막후정치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꽃이 피면 꽃이 진다’는 말처럼 ‘권력 2인자’들은 정권과 함께 사라졌다. 예외 없이 ‘영어의 몸’이 됐다. 막후 실세였던 2인자들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제의 폐단이다. 전두환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막후권력 실세였던 2인자들의 삶의 명암을 조명해 본다.
정권이 바뀌면 권력지형도 바뀐다. 역대 정권마다 대통령은 조직이나 관료보다 친인척이나, 킹메이커인 정권 2인자를 통해 막후정치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역대 정권에서 대통령의 친인척으로 위세를 떨친 인사들로 전두환 정권에선 전경환(친동생)씨가, 노태우 정권에선 박철언(처 사촌동생), 금진호(동서)씨가, 김영삼 정권에선 김현철(차남)씨가, 김대중 정권에선 김홍걸(3남)씨가, 노무현 정권에선 노건평(친형), 연철호(조카사위)씨 등이다. 6공 때 박철언 전 장관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의 사촌동생으로 대통령과 친인척이라는 후광을 등에 업고 ‘황태자’로 군림한 실세였다.
반면 대통령 일가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핵심 측근으로 행세한 그룹이 있다.
5공, ‘리틀 전두환’ 전경환 vs ‘6공의 황태자’ 박철언
5공 시절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정호영 전 특전사령관, 3허(허문도, 허화평, 허삼수), 6공의 이원조 전 은행감독원장, 이현우 전 경호실장, YS 정권의 홍인길 전 총무수석, 강삼재 전 사무총장, 최형우 전 고문, DJ 정권에선 권노갑 전 고문, 박지원 의원, 노무현 정권에선 이광재, 안희정, 이강철 전 수석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다.
대통령제하에서 막후정치의 폐단은 심각했다. 친인척과 권력 2인자들 간의 보이지 않는 권력다툼이 심각하게 펼쳐졌다.
전두환 정권 시절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대표적인 인사로 친동생 경환씨와 장세동 전 부장이 대표적이다. 한명은 ‘리틀 전두환’으로 한명은 ‘장세동 후계설’까지 나올 정도로 과도한 권력을 향유했다. ‘실세중의 실세’였던 경환씨의 경우 형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1980년 대통령 경호실 보좌관으로 임명됐으며 이후 새마을 운동 중앙본부 사무총장과 회장을 잇달아 역임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의 주변에는 각종 민원과 인사 청탁 등 권력의 도움을 받으려는 인사들로 붐볐다.
장 전 부장은 5공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징적인 인물이다.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장씨는 육사(16기)출신으로 전 전 대통령이 주도한 12·12 군사쿠데타에 참여했다. 5공이 들어선 이후 대통령 경호실장, 안기부장을 역임하며 실세로 군림했다. 안기부장 재직 당시에는 박철언 전 장관과 함께 1985년 북한을 방문, 김일성 수석과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협상을 주도하는 등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장 전 부장은 88년 5공 청문회에 출석해 전 전 대통령을 적극 변호해 ‘의리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충성심을 보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집권한 6공 시절에는 단연 박철언 전 장관이 ‘황태자’로 군림했다. 박 전 장관은 당시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정권의 풍운아 중 한사람이었다. 실제로 92년 대선 직전인 10월, 박 전 장관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YS의 압력으로 탈당하자 반YS 결집을 외치며 민자당을 탈당했다.
당시 김용환, 김복동 의원이 동반 탈당을 하면서 YS의 대권 프로그램은 위기를 맞이했다. 박 전 장관의 한 측근은 “당시 대선에 출마한 정주영 회장과 강영훈 총리도 함께 해 92년 대선을 위한 당을 마련하고 있었다”며 “그런데 약속했던 강재섭 전 의원이 당에 잔류하면서 유야무야하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박 전 장관은 이미 1987년 중반 월계수회를 통해 전국적으로 200만명의 사조직을 갖고 있었고 민자당내 월계수 회원들만 탈당해도 됐는데 강 전 의원의 배신으로 물거품이 됐다”고 덧붙였다.
‘소통령’ 김현철 vs ‘DJ맨’ 권노갑·박지원
박 전 장관이 정치권의 황태자로 군림했다면 ‘금융계 황제’,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던 이가 이원조 금융감독원장이다. 이 원장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죽마고우로 경북고 32회 동기동창이다. ‘하나회’를 이끌던 군부정권의 비자금 모금책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특히 5·6공 13년간 ‘이원조의 재가 없이는 시중 은행장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제권력은 막강했다. 그러나 5, 6공 군부시대를 풍미한 ‘2인자’들의 말로는 그 명성과는 무색했다. 4인방 모두 각종 횡령, 사기, 뇌물 수수 등 비리사건에 연루돼 정권이 끝난 후 차디찬 철창행 신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군부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측근 정치는 계속됐다. 특히 YS와 DJ 정부에선 대통령의 아들이 막후 정치와 각종 잇권사업에 뛰어들면서 ‘게이트’를 만들어 ‘폐해’가 심각했다. YS 정권시절 ‘소통령’으로 불리던 아들 김현철씨를 비롯해 홍인길, 강삼재, 최형우 전 의원이 정권 실세로 급부상했다. 특히 현철씨의 경우 문민정부를 쥐락펴락하면서 국정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증권회사의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현철씨는 1987년 대선에서 중앙조사연구소라는 여론조사기관을 만들어 부친의 선거 캠프에 가세하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YS는 공식 라인에서 올라온 보고보다 현철씨의 보고를 더 신뢰했고 이 때문에 정부의 핵심 요직 인사가 그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 당연히 사람과 돈이 몰릴 수밖에 없었고 ‘소통령’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대 2인자의 말로를 그 역시 벗어나지 못했다. 메디슨 특혜 의혹, 한보 게이트로 자신뿐만 아니라 YS 정권까지 무너뜨리게 만들었다.
최형우 전 의원은 6선의 국회의원으로 YS의 ‘오른팔’로 불릴만큼 권력의 핵심에 서 있었다. 1959년 야당이던 민주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시작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 간사장과 6월 항쟁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민주산악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YS와 함께 30여 년 동안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문민정부 출범 후에는 집권 여당의 사무총장과 내무부 차관을 역임했다. 홍인길 전 총무수석 역시 YS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는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집사를 맡았던 인물이다. 홍 전 수석은 단순히 청와대 살림살이뿐 아니라 정치 현안에도 폭넓게 간여하면서 영향력을 과시했다. 강삼재 전 의원 역시 YS 정권의 2인자로서 ‘역사상 가장 센 여당 사무총장’으로 불렸다. 하지만 YS 정권의 ‘2인자’인 현철씨와 홍 전 수석, 그리고 강 전 의원은 ‘한보 사건’과 ‘안풍 사건’으로 각각 법적 처벌을 받아 쇠락기를 걸었다.
DJ 정권의 2인자들 또한 YS 정권때의 ‘측근 정치’를 그대로 답습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들정도로 유사했다. 단지 DJ의 경우에는 3남이 모두 구설수에 오르면서 집권 후반기를 암울하게 보내야 했다. 특히 장남 김홍일씨의 경우 현철씨와 유사한 길을 걸었다. 홍일씨는 아버지 YS의 대선 승리를 위해 ‘나라사랑운동본부’(이하 나사본)라는 사조직을 운영한 현철씨처럼 민주연합청년동지회(이하 연청)를 결성해 DJ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일조했다.
아버지의 수행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차남 홍업씨는 DJ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인사로 보좌해왔다. 홍업씨 역시 대선 때 설립한 ‘밝은 세상’이라는 기획사를 맡아 ‘DJ 대통령 만들기’에 막후에서 지원했다. 하지만 아버지인 DJ가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권좌에 오르면서 세 아들의 운명은 바뀌었다. DJ 정권 말 3대 게이트인 정현준·진승현·이용호 게이트에 3남이 모두 연루되면서 이른바 ‘3홍 게이트’의 주인공이 돼, 법적·도덕적 심판을 받아야 했다.
‘영원한 DJ맨’으로 알려진 박지원 의원과 권노갑 전 고문 역시 5년 동안 정권의 앞과 뒤에서 ‘권력의 2인자’로 살아왔다. 박 의원의 경우 청와대 대변인, 문화관광부 장관, 정책기획수석, 정책 특보, 그리고 임기 말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박 의원에 대한 DJ의 신임은 각별했다. 특히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특사 역할도 주무부서가 아닌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맡길 정도였다. 권 전 고문 역시 DJ 정부 시절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실세였다. 당.정.청 어디에도 공식 직함이 없었지만 그의 말 한마디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박 의원과 권 전 고문은 각각 현대 비자금 사건과 현대 금강산 카지노사업 허가 과정에 뇌물 수수 혐의로 영어의 몸을 면치 못했다.
‘참여정부에는 2인자가 없다’는 게 참여정부 인사들의 주장이다. 친노 386이라는 정치 세력과 함께 부산출신 운동권 인사, 원로 운동권 등이 그룹별로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는 핵심 실세로 이광재 의원과 이강철 전 시민사회수석을 대표적으로 꼽고 있다.
참여정부, 안희정·이광재· 이강철 ‘실세 3인방’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이 의원의 경우 ‘노무현 대통령보다 노 대통령을 더 잘 아는 측근’이란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실제로 참여정부의 권력분산 아이디어나 청와대 조직개편, 각종 인사, 지역 사업 유치 등에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청와대 및 정부 각료 개각시 ‘이광재 파워’가 막강했다는 후문이다. 반면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역시 노 전 대통령의 신임이 막강했다. 워낙 영향력이 막강하다보니 DJ 정권을 계승한 ‘민주당 정권(호남 정권)’이라는 말보다 대구 출신 이 전 수석으로 인해 ‘영남 정권’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올 정도였다.
보이지 않게 ‘2인자 역할’을 한 이들이지만 권력의 단맛만큼 쓴맛을 맛봐야 했던 이들이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박연차 태광그룹 회장과 불미스런 돈거래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했다. 이 의원과 이 전 수석은 각각 박연차 불법자금 수수와 각종 잇권 사업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좌희정’으로 불리던 안희정씨의 경우 이미 불법대선자금 혐의로 감옥에 갔다왔다.
검찰은 측근 그룹뿐만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 조카사위 연철호씨, 딸 정연씨, 아들 건호씨, 나아가 권양숙 여사까지 전방위로 박 회장과 수상한 돈 거래와 관련해 수사를 벌였다. 하지만 검찰 수사는 지난해 5월말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자살로 인해 노건평씨를 제외한 법정 처벌을 받지 않았다. 친형인 노씨의 경우에도 건강상의 이유로 구속 집행정지를 받아 풀려난 상황이다.
#MB 정권과 박정희 정권 공통점은
“역대정권 중 친인척 비리 엄격”
유신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죽을 때까지 권좌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후계자 육성에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박 전 대통령은 ‘분할 통치’(Divide and Rule)를 통해 측근을 관리했다. 육영수 여사 죽음 이후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한 박근혜 전 대표가 ‘2인자’를 키우지 않는 배경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은 5·16 군사 쿠데타로 잡은 정권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정통성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군사정권으로서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당시 정부 각 부처나 언론, 심지어 기업에까지 정보부가 공공연히 개입했다. 중정은 국가위에 또 다른 국가였던 셈이다. 그 다음이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지키는 경호실장 자리였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의 다음으로 ‘2인자’는 경호실장과 정보부장의 차지가 됐다.
박정희 시해 사건인 ‘10·26사건’이 터진 배경이다. 사단은 15년 남짓 ‘대통령의 오른팔’로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 해온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후임으로 차지철 국회 내무위원장이 맡게 되면서다. ‘권력의 2인자’로 부상한 차 실장으로 인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파워게임이 벌어졌다. 차 실장은 ‘경호상의 이유’로 김 부장의 ‘보고’를 방해할만큼 두 인사의 갈등의 골은 깊었고 급기야 김 부장이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하게 됐다는 관측이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는 엄격했다. 단 지만씨가 마약복용 혐의로 구속된 것 외에는 눈에 띄는 비리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형인 동희씨의 경우 동생한테 누가 된다며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명박 정권 역시 취임 2년반이 흐른 지금 정국을 뒤흔들 친인척 비리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단지 이 대통령의 사촌 처형 김옥희씨가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 청탁과 관련해 30억 원 수수한 혐의로 구속된 게 1호인 셈이다. 하지만 정권의 ‘2인자’로 알려진 인사들에 대해서 말로는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현재 ‘권력의 2인자’로 알려진 이상득, 이재오, 천신일, 최시중 최측근 인사들에 대한 파워는 여전히 막강하다. 하지만 비리 혐의관련 의혹은 제기되고 있지만 실제로 드러난 게 없는 상황이다. 이에 정치권은 이명박 정권이 끝나는 2012년 12월 이후 ‘정권 2인자’의 운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홍준철 기자] maiocap@dailypot.co.kr
홍준철 기자 mariocap@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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