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기아의 외국인 선수였던 키퍼가 “미국 마이너리그에서는 몸쪽 공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특수 헬멧을 착용한다”고 이종범에게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종범은 이 헬멧 덕분에 공포증을 상당히 떨쳐냈다. 최소한 얼굴을 얻어맞을 일이 없으니 몸쪽 공에 움찔하지 않고 제 스윙을 했다. 심정수도 현대 유니콘스 시절인 2003년 두 차례나 얼굴을 얻어맞고 이종범과 비슷한 헬멧을 제작했다.이들에 대한 우려도 쏟아졌다. 몇몇 감독들은 “타자가 몸쪽 공을 두려워하는 순간, 이미 투수에게 진 것이다”라며 이들을 걱정했다. 검투사 헬멧을 쓰면 당장 안도감은 들겠지만 몸쪽 공에 대한 공포증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되고, 투수는 집요하게 몸쪽 승부를 고집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이종범과 심정수는 2003년 빼어난 활약을 했지만, 지난해에는 함께 부진했다. 그리고 올시즌. 이종범은 2년 넘도록 애지중지했던 특수 헬멧을 벗어던졌다.
이종범은 “특수 헬멧이 심리적인 안정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시야를 자주 가렸다. 이제 몸쪽 공을 의식하지 않고 타격할 자신이 있기 때문에 일반 헬멧을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몸쪽으로 사구가 날아들면 맞고서라도 출루하겠다는 각오도 내비쳤다. 이종범은 시범경기에서 타격 1위(0.458)에 오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검투사 헬멧을 버린 것은 자신감의 표현이었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성적으로 나타났다.심정수는 어떨까. 심정수는 삼성으로 이적한 뒤에도 특수 헬멧을 새로 만들어 쓰고 있다. “두 번이나 맞았는데 세 번 맞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심정수는 특수 헬멧 때문에 안경에 김이 서려 입맛에 맞는 공을 놓치곤 했다. 거추장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심리적 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고집이다. 심정수도 나름대로 좋은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무릎 부상과 선구안 난조를 보여 올해도 부진할 것이라는 의혹을 뿌리치고 시범경기에서 타격 5위(0.343) 홈런 3위(3개)에 올랐다.야구는 멘탈 게임이다. 힘과 기술보다는 심리적인 면이 경기를 지배하기도 한다. 이종범과 심정수가 헬멧을 벗기도 하고 다시 쓰기도 하는 배경을 그런 이유로 해석할 수 있다.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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