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가 쉬운게 아니더라고요”
“말하기가 쉬운게 아니더라고요”
  • 정소현 
  • 입력 2005-01-27 09:00
  • 승인 2005.01.2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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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전이 벌어진 28일 서울 장충체육관. 이날 최고의 관심거리는 바로 전국가대표 농구선수 정은순의 장내해설이었다. 마침 개막전은 2002년 자신이 은퇴할 때까지 몸담았던 삼성생명과 금호생명의 대결. 정씨는 끝날 때까지 파트너인 장내아나운서 박종민씨와 함께 쉴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경기가 끝나고 나니까 정신이 멍하더라고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날 정도였어요. 농구선수로서 첫 데뷔 경기를 가졌을 때도 그렇게 긴장하진 않았을 거예요.”해설자로서 그가 밝힌 첫 데뷔 무대 소감이었다. 당시 정은순은 마이크가 꺼진 것도 모르고 말을 계속할 정도로 경기에 몰입했다고 한다. 게다가 응원단 함성이 너무 커서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는’ 수준이었다고. 경기가 끝나자 목부터 칼칼해 오는 것이 “말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구나” 싶더란다.

지난 아테네올림픽 때 TV해설자로 나선 경험이 있지만 그에게 장내해설자란 직업이 아직은 낯선 듯했다. 정은순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바로 적절한 단어 선택과 표현력 부재. “농구는 같은 상황이 자주 반복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다보니 해설하는 입장에서 역시 같은 말을 반복해야하는 거죠. 그럴 때면 상당히 아쉬움이 느껴져요. 같은 3점슛도 좀더 다른 표현으로 설명할 순 없을까하고 항상 고민하게 돼요.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는데 쉽지 않네요.”돌발상황에서의 대처 능력도 아직은 보완해야 할 점이다. 얼마 전에는 경기 중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을 보지 못하고 놓쳐 한참을 벙어리 신세로 있어야 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아휴~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요. 다음 얘기할 내용을 종이에 적고 있는데 순식간에 일이 벌어진 거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상황 파악도 안되고 있는데 갑자기 아나운서가 ‘어떻게 된거냐’고 묻는거예요. 더구나 장내 모니터에 저희들 얼굴을 크게 클로즈업한 상태였거든요.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다 결국 ‘죄송합니다. 못 봤는데요’라고 말했죠. 얼마나 창피하던지….”해설 중에 갑자기 사레가 들려 곤혹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빠르게 말을 받아쳐야 하는 상황인데도 딸꾹질이 나올까 싶어 애써 숨을 참아야 했다. 말을 한동안 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 나중엔 숨을 하도 참아 얼굴이 터질 지경이었다고.오랜 시간 해오던 운동이었음에도 전문용어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말을 잇지 못했던 것도 웃지 못할 에피소드다.

하지만 선수시절부터 독하기로 소문난 정은순이다. 절대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또 한번 독하게 다짐했다. 최근 때아닌 학구열에 불타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각종 스포츠 경기를 녹화해 해설자들의 개성있는 말투와 표현력 등을 배우고 있는 것. 농구와 어울리는 표현들이 있을 때면 메모장에 꼼꼼히 적고 혼자 따라해 보기도 한다. 틈만나면 서점과 도서관에 들르러 농구 전문서적 읽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아는 게 많아야 할 말도 많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경기가 있는 날에는 컨디션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선수 시절 만큼이나 징크스에 주의를 기울일 정도. 정은순은 선수시절보다 더 바쁘고 힘든 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다시 선수생활을 꿈꾸진 않는다고 했다.

“코트 밖에서 선수들을 바라보면 정말 존경스러워요. 치열하게 몸싸움을 하고 빠르게 코트를 뛰어 다니는 그들이 너무 힘들어 보이거든요. 내가 어떻게 저런 플레이를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우습죠?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가?(웃음)”그러면서도 그는 “선수든, 해설자든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역시 코트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덧붙였다. 비록 유니폼 대신 점잖은 정장을 입고, 또 직접적인 플레이 대신 말로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는 입장으로 변했지만 코트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다면서. “관중들이 제 해설을 들으면서 경기를 관람할 것을 생각하면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어요. “정은순이 장내 해설을 한다더라”면서 보러 오시는 분들도 계실텐데…. 여자농구가 일반팬들에게 많이 알려지는 데 힘을 보태려면 선수시절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죠. 그런데, 제 위치가 해설자이다 보니 말발만 늘어서 입심 좋은 아줌마가 되면 어쩌죠?(웃음)”

“잦은 지방출장, 딸에게 미안”

정은순은 코트 컴백을 위해 어린 딸 ‘나연’이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지방 경기가 많아 아이를 돌볼 수 없는 탓에 부득이하게 부산에 계시는 시부모님께 맡긴 것. 이제 갓 두 살 된 예쁜 딸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심정이 오죽할까. 하지만 더욱 크게 슬픈 것은 나연이가 엄마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나연이가 굉장히 보고싶은데 고 녀석은 엄마가 보고싶지 않은가 봐요. 엄마가 없어도 찾는다거나 울지도 않는 거 있죠! 사실 나연이 때문에 여자프로농구연맹에서 장내해설자를 제안했을 때 많이 망설였거든요. 그런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젠 전화도 받지 않으려 한다니까요!”그는 아이가 눈에 밟힐 때마다 지갑 속 사진을 꺼내 한참을 바라보곤 한다.

마음은 당장 부산으로 내려가 아이를 꼭 안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 그때마다 정은순이 감정을 추스르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이 있다. 지금은 비록 생이별을 해야 하지만 나중에 딸이 컸을 때라도 엄마를 이해할 수 있도록 절대 부끄럽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겠다는 것. “나연이도 크면 엄마를 이해해주겠죠. 그러기 위해선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하구요. 희생을 감수하고 코트에 나선 만큼 멋진 해설로 보답하고 싶습니다!” 2005 겨울리그에서 정규리그 60경기를 해설하는 정은순의 장내 활약이 왠지 더욱 기대된다.

정소현  coda0314@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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