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는 올해 공식경기 첫 등판인 9일(이하 한국시간)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 등판, 5와 1/3이닝 동안 4안타 3실점으로 비교적 호투했다. 불펜투수들이 리드를 지켜줬다면 승리투수도 될 수 있었다. 박찬호는 이날 아웃카운트 17개 가운데 10개를 땅볼로 잡아냈다. 홈런도 허용하지 않았다. 타자들이 박찬호를 상대로 힘있는 플라이를 때리지 못했다는 증거다.박찬호는 14일 LA 에인절스와의 홈경기에서 6과 2/3이닝 동안 5안타 3실점으로 역투, 시즌 첫승을 거뒀다. 텍사스 팬들은 모처럼 박찬호가 상대 타선을 요리하는 장면을 보고 기립박수를 보냈다.박찬호는 경기 뒤 “만족스러운 피칭이었다. 낮은 코스로 공을 던지려고 노력했고, 투심 패스트볼이 잘 들어갔다”고 자평했다. 경기내용과 인터뷰를 보면 박찬호의 생존전략이 확연히 바뀐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제트기류 피하려 땅볼투수로 변신
박찬호가 변신을 서두르는 이유는 홈구장인 아메리퀘스트필드와 부상 후유증에 있다. 아메리퀘스트필드 상공에는 홈플레이트에서 외야 우중간 방향으로 ‘제트기류’라는 거센 바람이 분다. 중견수나 우익수 플라이가 될 만한 타구가 기류를 타고 홈런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투수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구장이다.박찬호는 제트기류의 최대 희생양이 됐다. 박찬호는 LA 다저스 시절부터 포심 패스트볼과 커브를 주무기로 삼진 또는 플라이아웃을 잡아내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박찬호가 텍사스 홈구장에 쉽게 적응했을 리 없다.
지난해 박찬호는 홈경기에서 13홈런을 허용했는데 이중 제트기류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큰 우측 홈런을 7개나 얻어맞았다.게다가 박찬호는 지난 3년 동안 허리 부상에 시달렸다. 이제 완쾌에 가까울 만큼 회복됐다지만 피칭 메커니즘이 원활치 못해 다저스 시절처럼 폭발적인 강속구를 뿌리지는 못한다. 박찬호가 예전의 패턴으로 던지려면 직구 구속이 150km는 쉽게 넘어야 한다. 중력을 무시한 듯 솟아오르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면 홈런을 맞을 확률이 낮다. 그러나 박찬호는 더 이상 타자와 정면으로 맞설 파워를 갖추지 못했다. 게다가 구장도 도와주지 않고 있다. 맞혀 잡는 피칭이 필요할 때다.
투심 패스트볼, 그리고 로케이션
장타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공을 낮게 던지는 것이다. 위력없는 공이 타자의 벨트 라인 위로 날아든다면 장타가 나올 가능성이 크지만, 무릎 근처로 파고 드는 공은 눈과의 거리가 멀어 정확히 맞히기조차 어렵다. 여간해서는 퍼올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타구를 띄우더라도 힘을 싣기가 쉽지 않다.이를 잘 알고 있는 박찬호는 틈만 나면 “가능한 한 낮은 쪽으로 던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직구 로케이션이 전체적으로 낮게 깔리면 커브 등 변화구의 효과도 높아져 타자로부터 헛스윙을 유도할 수 있다.
실투로 높은 공을 던져도 얻어맞을 확률이 낮아진다.무조건 낮게만 던진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구위가 뒷받침돼야 타자를 압도할 수 있다. 박찬호는 그 해법으로 투심 패스트볼을 선택했다.투수가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은 포심 패스트볼이다. 흔히 직구로 불리는 포심 패스트볼은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 4개를 공의 실밥에 걸쳐 잡고 던지기 때문에 마찰력이 커지고, 이 결과로 구속이 빨라진다. 박찬호가 다저스 시절 사용했던 주무기다.반면 투심 패스트볼은 검지와 중지를 솔기에 평행하게 얹어 던지는 구종으로 포심 패스트볼보다 스피드가 3~5km 정도 느린 공이다.
스피드가 줄어드는 대신 타자 앞에서 꿈틀거리며 약간 떨어지는, 효과적인 무기다. 타자가 정상적으로 스윙을 하면 공의 윗부분을 맞히기 쉬워 땅볼 타구가 많이 나온다.박찬호는 이 점을 노리고 2년 여의 시행착오를 거쳐 투심 패스트볼을 장착했다. 그의 투심 패스트볼은 올해 시범경기부터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투심 패스트볼 덕분에 스플리터, 커브, 슬러브 등 다른 변화구의 위력까지 배가되고 있는 느낌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박찬호의 직구는 이제 가라앉고 있다. ‘낮은 데로 임한’ 박찬호의 공이 ‘스트라이크’로 판정 받을 수 있을까.
김식 스포츠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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