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귀국장 ‘폭력사태’
얼음판이 깨지고 있다. 최근 대한빙상경기연맹 공식 홈페이지(www.skating.or.kr)의 `Q&A’ 게시판에는 한국쇼트트랙 파벌싸움으로 인해 팬들의 탄식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4일 미국에서 열린 2006 세계쇼트트랙선수권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남녀 대표팀 선수들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에 모였던 많은 시민들은 황당한 장면에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이날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선수들이 두 패로 나뉘어 어색한 모습을 연출하더니 마침내 안현수의 아버지 안기원(49)씨는 “대표선수단의 코치가 다를 정도로 파벌이 심한 쇼트트랙 경기에서 현수는 코치가 다른 국내 선수들에게서까지 견제를 받았다”고 불만을 표시하며, 선수들을 호통치다가 이를 말리는 대한빙상경기연맹 임원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에 대해 연맹관계자는 지난 5일 “빙상연맹으로서도 그동안 문제점으로 제기된 파벌문제 해결을 위해 동계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3∼4차례 회의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왔지만 뾰족한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라고 토로했다.갑자기 벌어진 소동으로 즐거워야할 환영식장은 졸지에 난장판으로 변했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공항에서 벌어진 한심한 장면은 그동안 눈부신 성과로 인해 감춰졌다가 여과 없이 드러난 한국쇼트트랙의 현주소다. 2005~2006시즌 월드컵대회 석권,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금메달 6개, 2006 세계쇼트트랙팀선수권대회 남녀동반 우승, 2006세계쇼트트랙선수권대회 금메달 7개 등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뒀지만 곪을 대로 곪은 파벌싸움과 불신으로 그 영광은 한순간에 비난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쇼트트랙 폐지 여론도
쇼트트랙의 파벌싸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작년엔 종목을 없애야 한다는 여론까지 비등했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지난 2월에 있었던 토리노동계올림픽에서도 남녀 쇼트트랙 대표팀은 파벌로 나뉘어 따로 훈련하는 안타까운 모습도 보였다. 다만 역대 동계올림픽 최고 성적을 거두는 바람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것 뿐이다. 파벌문제는 세계팀선수권대회와 지난 3일 폐막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다시 불거졌다. 빙상연맹의 한 관계자는 “심지어 방까지 같은 층에서 쓸 수 없다고 주장해 갑작스레 방을 바꾸는 일도 벌어지고 귀국길 비행기 좌석도 바꿔달라고 했을 정도”라며 “2003년 말 구타파문이 일었을 때 연맹에서 파벌문제도 함께 정리했어야 했다”고 혀를 찼다. 수년전부터 코칭스태프 선임문제를 놓고 선수들이 선수촌 입촌을 거부하고, 동계올림픽 대표선수 선발을 놓고 학부모측과 빙상연맹이 대립각을 세우는 등 끊임없는 불화에 몸살을 앓았다.
쇼트트랙계를 장악하기 위한 파벌 간의 신경전에 학부모들까지 가세하면서 스포츠맨십은 사라지고 투서와 시기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금메달을 6개나 휩쓴 지난 토리노동계올림픽에서 남녀 쇼트트랙 대표팀은 훈련기간에 파벌로 나뉘어 따로 훈련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연출했다. 안현수는 대회전까지 여자팀과 훈련을 했고, 진선유, 변천사는 남자팀에서 따로 훈련을 했다. 박세우 코치는 안현수, 최은경이 다니고 있는 한국체육대 출신이고 송재근 코치는 단국대를 나와 경희대에서 지도자생활을 했다. 결국 한체대와 비한체대의 편 가르기 싸움이었다. 두 코치는 2004년 11월 최은경, 변천사, 강윤미, 진선유 등이 코칭스태프의 ‘구타 훈련’을 이유로 태릉선수촌을 이탈한 사건으로 대표팀 지도자들이 물러난 뒤 새로 선임됐지만 파벌의 골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문화연대 “빙상협 회장 사퇴”촉구
올해 초 시민단체 문화연대에서는 국가대표 쇼트트랙팀 파벌내분 사건에 대해 “우리는 지저분한 금메달을 원치 않는다. 그 더러운 싸움판을 걷어치워라”며 지난 1월 30일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문화연대는 파벌주의가 만연한 체육계에서도 쇼트트랙은 그 파벌의 폐해가 극심했다며 ‘한체대파’와 ‘비한체대파’ 간의 암투로 인해 선수들이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각각의 코치들을 앞잡이로 내세워 학부모를 선동하고 어린 선수들을 이간질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빙상계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 그리고 특히 언론에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출전을 앞둔 쇼트트랙 국가대표팀의 코치가 작년 말 국제대회에서 선수들에게 한국선수를 방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이 보도된 점을 상기시킨 후 “빙상협회 임원들이 선수로부터 이러한 코치의 지시사항을 확인했음에도 단지 코치 자신이 부인한다는 이유만으로, 선수들의 훈련이 더 중요하다면서 못본척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또 “쇼트트랙은 지난해 코치의 선수구타사건, 학부모의 특정 코치 거부, 선수들의 코치 선택, 2인의 코치가 ‘자기 선수들’ 따로 훈련하는 등의 웃지 못할 코미디를 시리즈로 만들어 낸 ‘사고종목’”이라고 명명하고 “협회는 그 긴 시간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이제는 기자들에게 보도를 자제해 달라며 사정하고 있다”고 거듭 비판했다.문화연대 측은 “오직 금메달이 중요하니까 파벌끼리 치고 받더라도 성적만 내면 된다는 병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시끄럽더라도 결국 메달만 따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기회주의적인 발상은 한국의 체육을 병들게 했던 첫째가는 원인”이라고 엘리트 체육의 병폐를 지적했다. 특히 빙상연맹은 작년부터 이어졌던 쇼트트랙팀의 불상사들을 미봉책으로만 일관하다 병을 키운 꼴이 되었고 태릉선수촌은 메달에만 집착하며 쉬쉬 하다가 이 땅의 체육을 망가뜨리는 데 기여했다고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문화연대는 ▲빙상연맹 회장의 사퇴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진 교체와 연루임원 징계 ▲대한체육회 김정길 회장의 사과 ▲이에리사 태릉선수촌장 사과 등을 요구했다.
협회 대응 미봉책 수준
대한빙상경기연맹이 쇼트트랙의 ‘파벌싸움’에 대한 대표팀 운영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빙상연맹은 지난 6일 오후 3시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긴급 상벌위원회를 열어 “파벌훈련을 방지하기 위해 감독과 코치 2인 체제로 코칭스태프를 구성하고 남녀 대표팀을 통합해서 훈련하기로 했다. 감독과 코치 선임은 대표선발전 이전에 선임하겠지만 자격요건에 대해선 충분히 시간을 갖고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연맹에 따르면 쇼트트랙 대표팀은 남녀 각각 5명씩 총 10명으로 운영하고 대표선수 정원 외에 선발전 랭킹순위에 따라 예비후보를 정해 결원이 발생하면 충원시키기로 했다.
또 15일 개막될 제21회 전국남녀 종합쇼트트랙선수권대회를 국가대표 선발전 자격대회로 정해 종합순위에 따라 남녀 각각 15명씩을 대표팀 후보군으로 선발하기로 했다. 여기서 선발된 30명을 토대로 9월 20~30일 사이에 2006~2007 쇼트트랙 국가대표선발전을 펼쳐 남녀선수 5명씩을 추려낸다는 방침이다.한편, 빙상연맹은 지난 6일 오후 3시30분 긴급 상벌위원회를 열어 지난 4일 벌어진 안현수 아버지 안기원씨의 연맹 부회장 폭행사건과 함께 기존 대표팀 코칭스태프의 훈련방식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또 오후 3시에는 박성인 빙상연맹 회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갖고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어른들의 유치한 이권다툼과 파벌싸움에 선수들까지 물들고 피해를 입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안타까운 형편이다. 빙상연맹의 한 관계자는 “올해부터 원칙과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해 쇼트트랙 대표팀을 이끄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연맹의 방침을 따르지 않는 선수와 코칭스태프는 퇴출시킬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다가오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준비하는 차원에서라도 빙상연맹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파벌문제’를 깨끗이 정리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는 곧 빙상연맹을 바로 세우고 더나가 한국 체육계의 병폐를 바로 잡는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 한국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도 연맹 집행부 vs 학부모 ‘힘겨루기’
한국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이 도입 20년 만에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다. 한때 세계 8강에 들며 황금기를 구가하던 싱크로지만 지난해 선수 선발에 불만을 품은 일부 대표 선수들의 이탈로 촉발된 갈등이 학부모와 연맹 집행부의 힘겨루기, 파벌싸움 양상으로 번지며 급격히 추락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7월에 열렸던 제33회 ‘해군참모총장배전국수영대회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 대회’에서는 심판들의 집단 보이콧 사태로 인해 논란을 빚었다. 심판들이 “싱크로가 파벌 싸움으로 만신창이가 된 가운데 일부 학부모들이 월권행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해 잠정 연기됐었다.한국 싱크로는 골치 아픈 종목이라는 낙인이 찍혀 전국체전에서도 정식 종목 채택 2년 만에 다시 시범 종목으로 밀려났다.
게다가 과거 예술성을 높이 사 문호를 개방했던 대학들도 이제는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다. 지난해 고교 랭킹 1위조차 대학에 낙방하자 비인기 종목의 설움에도 꿋꿋하게 물살을 헤치던 중학교 및 고교 선수들이 대거 풀장을 떠났다. 이런 와중에 싱크로의 대학 미만 등록 선수는 10여명으로 급감했고, 이제는 대표팀을 구성하기도 민망할 지경이 됐다. 때문에 싱크로는 지난 3월 6일 싱가포르에서 개막된 ‘제7회 아시아수영선수권대회’에 아예 출전조차 못했다. 우리보다 몇 수 아래였던 북한이 이번 대회에 솔로와 듀엣에 선수를 내보내 일취월장한 실력을 뽐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싱크로의 추락은 더욱 쓰라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들어 일단 대한수영연맹과 싱크로 관계자들 모두 어떻게 해서든 싱크로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하고 있다는 것. 문제는 정상화 해법을 둘러싼 양측의 입장 차를 어떻게 절충하느냐이다. 수영연맹은 과감한 세대교체로 어린 선수들을 키우고, 경기인 출신을 싱크로 수뇌부로 임명해 완전히 판을 바꿔야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싱크로 중진들은 12월 도하 아시안게임까지는 베테랑을 투입해 메달권에 진입함으로써 한국 싱크로의 위신을 지킨 뒤 전폭적인 물갈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까지 ‘국제수영연맹(FINA) 기술위원’을 역임하며 한국 싱크로 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신민자 대한수영연맹 부회장은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돼 원로로서 참담하기 그지없다”면서 “이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보다는 함께 싱크로 발전을 위해 뜻을 모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대한수영연맹과 싱크로 양측이 머리를 맞대고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 위기에 빠진 싱크로를 어떻게 회생시킬 수 있을 지가 주목된다.
구명석 gms75@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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