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밀란과는 ‘앙숙’
하지만 단지 환승을 위해 잠깐 내려선 베니스의 풍경은 ‘이 도시를 금세 등졌다간 평생 후회하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재빨리 저녁 기차 편을 확인한 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이 유명한 수중도시의 곳곳을 누볐다. 이탈리아답게 길바닥과 공공시설물은 어김없이 지저분했지만 운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도시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노 젓는 사내들과 그들이 올라선 작은 갑판 아래 둘러앉은 관광객들은 곤돌라 바깥의 세상을 여유롭게 돌아보며 짧지만 값비싼 여유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내겐 시간이 많지 않다. 베니스의 매혹보다 밀라노에서 펼쳐질 더비 매치의 유혹이 더욱 강렬했던 까닭이다.같은 지역에 연고를 둔 팀들이 맞붙는 경기를 흔히 더비 매치라 한다. 그 중에서도 밀라노 연고의 두 팀이 벌이는 ‘밀라노 더비’는 2년 전 FIFA가 발간한 「FIFA 매거진」이 꼽은 ‘세계 축구 10대 더비’@@@@@에 포함되었을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20세기 초, 구단 운영방침에 반발한 멤버들이 AC밀란을 박차고 나와 인테르나치오날레(Internazionale)라는 이름의 또 다른 밀라노 클럽을 창설하면서 밀라노 더비의 역사는 시작됐다. 적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한 지붕 밑에 둥지를 튼 AC밀란과 인터밀란의 다툼은 근래들어 AC밀란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오랜 기간 리그 우승의 기쁨을 맞보지 못한 인터밀란 팬들에게 밀라노 더비는 그래서 더욱 자존심을 곧추세울 기회의 장으로 인식된다. 더비 매치가 갖는 또 다른 의의는 이들이 각각 산 시로를 원정팀으로 방문하는 1년에 한 번 뿐인 날이라는 점이다. 내 집 안방에서 손님대접을 받는다니 라이벌전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지만 벌써 100년 넘게 이어져 온 두 팀의 자존심 싸움은 아직도 변함없다. 한 도시를 대표하는 팀이 둘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양 팀의 공통적인 신조인 셈이다.
유벤투스도 ‘전국적 인기’
이탈리아 대표구단으로 인정받는 유벤투스의 전국적 인기는 밀라노에서도 다르지 않다. 유벤투스의 10번이 이탈리아 대표팀의 10번 유니폼을 입는 전통은 AS로마의 판타지스타 프란체스코 토티의 등장으로 깨졌지만 명문의 명성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다. 리그 1위를 달리면서도 관중 감소로 고전하는 유벤투스가 며칠 전 경기장 입장 티켓 대폭 인하를 선언했던 일을 돌아보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높은 입장료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장 위치가 유벤투스의 결점이다. 경기장 코앞까지 트램(tram, 노면 전차)이 진입하는 밀라노 경기장의 접근 용이성이 더욱 돋보이는 이유다. 매장에서 한 벌에 70~80유로(약 10만원~12만원)에 팔리는 유니폼 상의는 하루에도 수십~수백 벌이 새 주인을 맞이한다.
하지만 막상 거리에 나서면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경기날이면 도시 곳곳에서 연고지 유니폼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영국의 분위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산하다. 경기장으로 가까이 갈수록 검정색과 빨간색 줄무늬가 교대로 그려진 AC밀란의 유니폼과 파란색과 검정색이 번갈아 놓인 인터밀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하철이나 트램 안에서도 이들은 그저 얌전하다. 독일 서포터들처럼 차내에서 이미 흥분하거나 그리스 서포터들처럼 도시 곳곳을 서포터들의 공연장으로 만드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짐짓 점잖은 표정과 제스처로 일행과 함께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상상을 초월한 응원전
시내에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16번 트램을 타는 것이다. 트램 앞뒤에는 목적지를 알리는 ‘산 시로(San Siro)’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박혀있다. 자, 이제 밀란 더비가 열리는 산 시로의 현장으로 출발하는 순간이다. 경기장 주변은 역시나 북적댄다. 이날 홈팀으로 나설 AC밀란은 이에 따라 더 많은 객석을 배정받았고 당연히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AC밀란을 응원한다. 경기장 밖에서도 파란빛이 감도는 인터밀란 유니폼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문제는 경기 티켓이다. 암표를 사는 데에는 약간의 지식과 배짱이 필요하다. 달라는 대로 돈을 다 주었다간 바가지를 쓰기 십상이고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아예 표를 구하지 못하거나 경기가 시작한 뒤에나 입장하게 된다. 마침 경기 시작이 15분 앞으로 다가온지라 초조함도 더하다. 이러다가 경기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것은 1년에 두 번밖에 없는 밀란 더비가 아닌가. 기회를 놓치면 축구 낙원의 문 앞에서 등을 돌려야 한다. 짧은 시간표를 들고 갈등하는 사이 이 능숙한 장사꾼들은 “사지 않을 거면 얼른 말해라. 다른 사람에게 팔겠다”라며 마음을 더욱 흔들어놓는다. 1인당 85유로에 사이드라인 중앙 좌석이라면 정가보다 싸긴 싸다. 무사히 입구를 통과해 자리에 앉고 보니 이거 웬걸, 코너킥 깃발 뒤쪽의 사각지대다. 객석의 높이도 낮아 관중 소요를 예방하기 위해 쳐 놓은 그물이 시야를 가리는 통에 경기장 반대편의 상황은 쉽게 파악되지 않는 위치다. 예산을 뛰어넘는 거액을 투자한 대가가 이거라니. 아쉬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주체할 수 없는 이 억울함! 하지만 이것도 잠시. 귓전을 때리는 양측 서포터들의 격렬한 함성과 함께 그라운드에 발을 들인 슈퍼스타들의 등장은 온갖 상념을 일거에 날려버린다.
어쨌든 관중이 꽉 들어찬 산 시로에 앉아 밀라노 더비의 물결 속에 밀려든 것이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양 팀의 응원전은 극을 향해 치닫는다. 형식상 AC밀란의 홈으로 지정된 이날 경기는 당연히 AC밀란 팬들에게 더 많은 표가 배정되어서 경기장은 빨간색으로 뒤덮였다. 물론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인터밀란 팬의 수도 수만에 이를 테지만 아무래도 원정팀으로서의 열세를 벗어던지기는 힘들다. 거대한 펼침막과 수많은 홍염으로 분위기를 달군 양 팀의 서포터들의 표정은 자못 진지하다.
아드리아누의 ‘대활약’
이날 두 팀의 경기는 꽤나 답답했다. AC밀란은 셰브첸코와 크레스포를 앞세웠고 인터밀란은 비에리와 아드리아누를 내세워 골을 노렸지만 꽉 막힌 수비를 뚫기란 쉽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공격수들이 모였지만 이를 뛰어넘는 수비수들의 방어가 골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경기가 재미없는 것은 아니어서 시간은 금세 금세 지나간다. AC밀란은 피를로와 카카가 이끄는 중앙 미드필더의 힘이 위력적이고 인터밀란은 공격수 아드리아누가 수비수 서넛을 휘젓고 다니며 슛을 날리는 모습 자체만으로 나를 흥분시킨다. 경기는 결국 0-0으로 끝나고 말았다. 근 20만 원을 들여 골이 없는 경기를 보고 나오는 심정이란 기쁠 리 없다. 90분을 나름대로 만끽하긴 했어도 허탈한 마음을 감추기란 어려운 법. 더비 경기의 열기도 승패가 갈리지 않은 마당에 제대로 느끼기란 어렵다.
터덜터덜 경기장을 빠져나오려니 아쉬움이 길게 늘어져 바닥에 붙어있기라도 한 듯 발길이 제대로 떨어지질 않는다. 더군다나 - 나중에 안 일이지만 - 이 경기를 위해 포기한 PSV에인트호벤-아약스 경기에서 이영표가 골을 넣은 PSV에인트호벤이 완승을 거두었다하니 아쉬움이 더 크다. 하지만 어쩌랴. 어쨌든 밀라노 더비의 그 화려한 열기를 느낀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7만이 훌쩍 넘는 관중이 일제히 경기장을 빠져나오니 돌아갈 길이 막막하다. 경기장 앞 정류소에 트램 10여 대가 대기 중이다. 트램은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관중을 꽉꽉 채워 넣자마자 경기장 앞을 떠났고 그렇게 관중은 무리 없이 시내로 돌아가고 있었다. 밀라노는 이탈리아라기보다 보통의 유럽과 비슷한 분위기라더니 이런 행정적 지원은 정말 이탈리아답지 않게 센스 있는 조처라는 생각이 든다. 밀라노는 나와 그리 궁합이 맞는 도시는 아닌 것 같다.
올 때마다 크고 작은 해프닝이 벌어진다. 이번에는 정말 끔찍했다. 경기를 보고 난 뒤 스포츠서울에 관전기를 송고하기 위해 밀라노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한국인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난 뒤 숙소에 늦게 돌아간 덕에 주인과 트러블이 생겨 말 그대로 쫓겨나고 말았다. 새벽 두 시가 넘어 시내를 헤매다 역전 공중전화로 서울에 전화를 건 뒤 노트북을 전화박스 위에 올려놓고 기사를 읽는 것으로 송고를 대신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음침하고 무서운 인상을 가진 사람들만 가득하다. 시내를 밤새 누벼도 빈 방 있는 숙소는 찾을 수 없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 결국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역 뒤편의 작은 모텔에 방을 얻어 눈을 붙였다. 샤워를 하면 바닥 하수구로 물이 빠지지 않던 그 방에서 밀란 더비의 흔적을 곱씹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아무래도 밀라노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구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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