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서 올라탄 밤 기차는 시끌벅적하다. 한 칸에 간이침대 여섯 개가 들어찬 객실은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로 빽빽하다. 기차 출발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허겁지겁 역에 도착했던지라 일단 침대 위에 가방을 올려놓은 채 복도 창가에 앉아 숨을 돌렸다. 레알 마드리드와 마르세유의 경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경기장을 빠져나오느라 정신없이 달려야 했던 거다. 하루에 한 번뿐인 야간열차를 잡아타려면 어쩔 수 없는 일. 화려한 피날레를 눈에 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튿날 벌어질 이천수의 챔피언스 리그 데뷔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배낭 여행객 ‘북적’
기차는 출발했지만 복도에는 각국에서 몰려든 젊은이들이 다양한 악센트의 영어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기대에 찬 표정의 젊은이들에게 밤기차는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런던의 흑인 대학생과 스페인의 고등학생, 그리고 칠레에서 날아온 배낭여행객이 어우러져 수다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언어는 다르지만 공통된 화제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 축구 하나면 누구와도 금세 친구가 될 수 있다.
칠레인에게 이반 사모라노와 마르셀로 살라스 이야기를 꺼내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반가워한다. 낯선 아시아인에게서 자국민의 이름을 듣는 일은 분명 뿌듯한 일인 것이다. 살짝 들뜬 칠레 청년은 전성기를 마치고 남미로 돌아간 살라스의 근황을 쉴 새 없이 늘어놓는다. 몇 분 뒤에 시작된 스페인 학생과의 논쟁은 다소 피곤했지만 그런 점에서 오히려 흥미로운 경험이다. 세상에, 월드컵 8강전이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점철된 경기라니! 소가 웃을 일이라고 쏘아붙인 뒤 객실로 돌아와 눈을 붙였다. 어리석은 것들!새벽녘에 도착한 산 세바스티안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이른 시간이라 인적은 드물지만 유연하게 뚫린 도로를 따라 펼쳐진 해변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게다가 해가 중천에 오르면 윗옷을 벗어제낀 미녀들까지 득실댄다 하니 오직 레알 소시에다드의 경기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은 나로선 이천수가 고마울 따름이다. 산 세바스티안은 해변에 인접한 호텔과 곳곳에 즐비한 고급 식당들은 이곳이 서유럽 부자들의 단골 휴양지라는 이야기를 실감하게 한다. 흑인도, 동양인도 찾아보기 힘든 이 도시에서 한국인은 분명 낯선 존재.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힐끗힐끗 눈길을 흘린다. 종종 ‘이천수’와 ‘꼬레아’를 외치는 목소리도 들린다. 유럽 어디를 가나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취급되던 내게 이것은 분명 색다른 경험이다. 이천수가 레알 소시에다드에 입단한 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마드리드에 깊은 ‘적대감’
산 세바스티안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속한 도시다. 바스크는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처럼 스페인 중앙정부에 꾸준히 반기를 들었던 전통적인 ‘반골’ 지역이다. 축구장에서도 바스크 지역 팀들은 마드리드 팀들과의 경기에서 유독 끈질긴 면모를 보인다. 한일전을 떠올린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바스크와 마드리드의 뿌리 깊은 적대감을 이해하려면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 「게르니카」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바스크 주민들이 마드리드로 대표되는 스페인 중앙 정부에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명으로 사용된 게르니카는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이름이다. 게르니카는 지난 1937년 4월, 독일 나치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초토화됐다. 불과 세 시간 동안 진행된 폭격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수는 무려 1600명에 달했다. 충격적인 것은 이 폭격이 나치의 신무기 실험을 위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공화파를 상대로 내전을 벌이면서 독일 나치의 지원을 받았던 프랑코 세력은 내전이 끝난 뒤에도 독일 측에 게르니카 학살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바스크 주민들이 마드리드를 용서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경기장 테러위험 ‘상존’
두 지역은 최근 들어 지속적으로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지만 긴장은 여전하다. 2004년 2월 마드리드에서 발생한 대형 폭탄 테러 사건이 스페인 중앙 언론에 의해 ETA가 저지른 것으로 의심받은 일은 두 지역의 긴장관계가 단시간 내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뉴욕 9·11 사태가 발생한 지 꼭 911일 만에 일어난 이 사건은 정황상 알 카에다의 소행으로 추정되었지만 발생지가 마드리드였다는 이유만으로 ETA가 유력한 용의 선상에 올랐다.
같은 해 12월, 레알 소시에다드가 레알 마드리드와 원정경기를 가지던 중 종료 5분을 남겨놓고 경기가 취소된 일 역시 같은 이유로 우울하다. 당시 당국은 경기장에 폭탄이 설치되었다는 제보에 따라 경기를 황급히 중단시켰다. 이처럼 심상찮은 역사적 배경은 그라운드 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바스크 지역 팀들은 마드리드 팀들을 상대로 경기할 때면 전력 이상의 경기력을 보인다. 바스크 지역의 대표적인 축구팀은 이 지방의 주요도시인 빌바오와 산 세바스티안에 연고를 둔다.
대다수 한국인들에게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명성으로 잘 알려진 빌바오는 축구계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다. 바스크 민족의 정체성을 팀의 성적보다 더 중요시하는 아틀레티코 빌바오 팀의 운영방침 덕분이다. 이 팀은 바스크 지역 출신 선수들에게만 입단을 허용하는 규정을 상당히 오랜 시간 지켜오고 있다. 그러면서도 항상 평균치 이상의 성적을 거두는 놀라운 저력을 발휘하고 있어 팀에 대한 지역민들의 자긍심이 정말 대단하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구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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