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레전드 신진식, ‘갈색 폭격기’ 세계 배구계 폭격
살아있는 레전드 신진식, ‘갈색 폭격기’ 세계 배구계 폭격
  • 배수호 
  • 입력 2007-02-14 17:00
  • 승인 2007.02.14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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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들이 판치는 2007 프로배구에서 ‘살아있는 레전드’로 불리며, 35살의 나이에도 꾸준한 활약을 펼치는 선수가 있다. 삼성화재배구단에서 ‘좌세진, 우진식’ 쌍포를 이루며 프로스포츠 사상초유의 77연승, 대업을 이룬 신진식이 그 주인공이다. 1년 선배 김세진이 은퇴한 프로배구에서 그의 이름 앞엔 이제 ‘레전드’란 수식어가 붙는다. 배구계의 살아있는 레전드, 신진식. 갈색폭격기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배구인생을 들여다봤다.

신진식의 배구 인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됐다. 신진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을 가게 된 전주 송천초등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시작된 배구에 재미를 느꼈다. 당시 신진식은 높이뛰기 선수와 배구를 겸할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난 아이였다.
그러나 그의 어린시절 배구인생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배구부가 있는 덕진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초등학교 6학년 때 송천초등학교에서 덕진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러나 덕진중학교 배구부는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해체가 되고 만다. 신진식은 “당시 배구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운이 좋게도 선수 중 몇 명은 남성중학교로 가게 되었고 그 중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신체조건 부족, 체력으로 극복
그는 남성중학교를 마치고 남성고등학교 2학년 때 17세 미만 배구대표로 뽑혀 제 2회 세계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신진식은 이 대회를 자신의 배구인생에 한 획을 그은 대회라고 말한다.

“벌써 20여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세계대회에서 준결승까지 올랐다. 아쉽게 준결승전에서 패하면서 브라질과 3~4위전을 펼치고 난 후 이런 생각을 했다. 세계적으로 나는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신체적 조건에서 그들에게 못 미치고 기술적인 면도 부족했다.”

신진식은 그 당시 대회에서 자신의 키가 작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후 신진식은 지속적인 점프 연습과 작은 키를 보완하기 위한 한 박자 빠른 공격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의 결론은 체력이었다. 그는 자신의 배구선수로서 부족한 신체조건을 보완하기 위해 홀로 꾸준한 체력훈련을 했다.

결국 그런 노력에 힘입어 그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예선전에 당당히 대표선수로 선발될 수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있었던 올림픽 예선전에서 숙적 일본을 3:1로 누르고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한·일전 승리의 주역이라는 이유와 더불어, 배구선수 ‘신진식’이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서서히 팬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 항상 좋았던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6년 7월에 있었던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을 앞두고 신진식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상하게 나는 한창 몸이 좋았을 때 부상을 입게 된다. 1996년 당시에도 올림픽 예선전을 치르며 몸이 가장 좋은 페이스였다. 그러나 그해 5월 벌어진 대학연맹전에서 발목 부상을 당해서 석 달 동안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다. 올림픽 본선 때 대표로 경기에 뛰었지만 부상여파로 제대로 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며 당시 상황을 아쉬워했다.
신진식에게 부상은 이때만이 아니었다. 한창 몸이 좋은 상태로 펄펄 날았던 2002년 아시안게임 결승에서도 발목을 다쳐 무릎 밑까지 부어오를 정도였다.

그는 잦은 부상과 재활과정에서 힘들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2002년 부상을 당하고 고독한 재활과정이 힘들어 술도 가끔 마셨지만 신치용 감독의 질타와 조언으로 힘든 과정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내가 만일 삼성화재 소속이 아니었다면 분명 나의 배구선수로서의 생명은 이미 끝났을 수도 있다. 타구단도 그렇지만 삼성은 선수들의 부상에 대한 재활시설 및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있다. 다행히 나는 충분한 재활과정을 거쳐 경기에 임할 수 있었으며 이제까지 선수생활을 무사히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77연승, 신화 속으로
신진식은 사실 대학졸업과 동시에 삼성이 아닌 현대에 입단할 상황이었다. 성균관대학교 출신이던 신진식에게 처음 러브콜을 보낸 팀은 현대배구단이었다. 당시 현대는 성균관대학교에 전폭적 지원을 했다. 그러나 그가 4학년 때 지원팀이 삼성화재로 바뀌면서 그의 배구인생은 달라졌다. 삼성화재는 그가 입단할 당시만해도 김세진 외에는 특별한 스타선수가 없었다.

“나는 당시 삼성화재 소속이었던 김세진 선수와 대학시절에 이어 맞대결을 펼치고 싶었다.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같은 사이지만 한창 젊었을 때는 선수로서 자웅을 겨루고 싶었다.”

그는 1996년, 삼성화재에 입단하게 되었다. 1995년, 1년 먼저 삼성화재에 입단한 김세진과 그는 좌진식, 우세진을 이루며 삼성화재의 무적시대를 여는 주인공 역할을 했다. 2001년 1월 7일 대한항공전을 시작으로 삼성화재는 77연승이라는 구기 종목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2004년 배구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현대캐피탈에 3:2로 아쉽게 패하면서 기록이 깨졌을 때, 현대 배구단 관계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배구 팬들마저 아쉬움의 탄성을 질렀다. 그만큼 당시 배구판에서 삼성이란 존재는 거대한 힘이었다. 당시 삼성은 신진식, 김세진, 최태웅, 김상우 등 국가대표에 버금가는 초호화멤버가 주축이었다.


은퇴, 생각해 본 적 없어
‘77연승 당시 다른 팀 선수들에게 미안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인간이기에 당연히 미안한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승부를 결정지어야만 하는 스포츠에서 인간적인 마음으로 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나를 비롯해 우리 팀, 선수들은 모두 그 어느 팀 보다 혹독한 훈련을 했고 결과가 좋게 난 것뿐이었다”면서도 “당시엔 사실 인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에 다른 팀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도 못했다. (웃음)작년에 현대가 우승하고 친구인 후인정(현대캐피탈)선수에게 전화가 왔다. 술 한 잔 하자면서. 그땐(77연승 당시에) 왜 그렇게 연락 안했냐고 하는데 할 말이 없더라”며 당시의 마음고생을 에둘러 표현했다. 결국
그 역시 한 명의 배구선수이기 이전에 가슴이 따뜻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제 팀의 최고참 선수가 된 신진식. 얼마 전 삼성화재에서 10년을 넘게 동고동락한 김세진 선수의 은퇴를 지켜 본 그의 심정이 궁금해졌다.

“함께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짓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아쉽다. 그러나 부상으로 인한 불명예 은퇴가 아닌 최고의 위치에서 은퇴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웃으며) 나는 아직 은퇴 생각이 없다. 뛸 수 있을때까지 뛰어보고 싶다.”

그의 목소리는 지난 199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최고참인 33살의 나이로 상대팀 진영에 스파이크를 꽂던 힘찬 몸짓처럼 조용했지만 묵직했다.


#신진식 인터뷰 “배구하는 매 순간이 기쁨”

-배구를 시작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배구를 하는 매 순간이 내겐 기쁨이었다. 특히 우승할 때 기분은 말로 표현 못할 정도의 기쁨이다.

-팀이 77연승이란 대기록을 수립했을 당시, 일부 우수선수 독식으로 따낸 결과라는 비판이 있었다. 당시 심정은.
▲77연승은 우수선수의 독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순전히 훈련의 결과이다. 다른 팀 보다 힘든 훈련과정을 참아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과다. 나는 당당하게 생각하는데 아직도 그 과정을 우수선수의 독식이라고 단순하게 비판하는 것은 코칭스태프, 선수들과 구단의 노력을 평가절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10년 후 자신의 모습은.
▲(웃음) 10년 후는 모르겠고 20년 후쯤엔 아마도 배구 꿈나무를 육성하고 있을 것 같다. 배구계에 남는다면 중, 고등학생들을 기본기부터 탄탄하게 가르쳐서 한국배구가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우뚝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평소 취미 생활은.
▲낚시를 즐긴다. 바다낚시를 갈 때는 꼭 아내와 함께 간다. 아내가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잡는대로 즉석에서 회로 먹곤 한다. 평소에는 조용히 낚시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낚시하는 동안 깊은 생각도 하고 지난 시즌 동안의 나 자신에 대한 평가도 스스로 해본다.

-평소 주량은.
▲비시즌에는 즐겨 먹는 편이다. 소주나 맥주 등 가리는 술도 없고 마시는 것은 좋아하지만 (웃음) 잘 마시진 못한다.

-사춘기 시절이 특별히 힘들진 않았는가.
▲중, 고교시절 때 남들 공부만 하듯이 엄청 운동을 했다. 매도 많이 맞고 운동 했던 기억 뿐이다. (웃음)숙소생활을 해서 반항할 생각조차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은사는.
▲고등학교 시절 감독님이셨던 김은철 은사님인데, 배구를 하고 나서 배구의 재미를 알게 해주신 분이시다.

-신치용 감독과 김호철 감독의 지도스타일은.
▲김호철 감독님은 밖으로 많은 표현을 하는 반면, 신치용 감독님은 묵묵히 보고 계시다가 중요한 한 마디씩을 하신다. 특히 신치용 감독님은 선수들을 뭉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큰 힘이 있으신 분이다.

-현재 용병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용병 때문에 국내 선수들이 한층 높은 기량이 나오지 않나 생각한다. 운동선수는 보고 배우는 것이 가장 빠르다. 기량이 좋은 외국선수들이 들어오면서 국내선수들의 기량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올해 프로배구의 흥행이유는.
▲단연 용병이라 생각한다. 용병 때문에 팀 컬러가 바뀐다. 대한항공이 그 대표적 경우이다. 기량이 좋은 용병들이 들어오면서 매 경기가 재미있어진 것 같다.

-팀 동료 용병선수 레안드로는 어떤 선수인가.
▲용병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팀 내 선수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레인드로는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고 한국말도 적극적으로 배우려고 한다. 용병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팀 분위기와 얼마만큼 잘 융화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배수호  4477b@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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