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여자프로야구연맹이 정식 출범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여자야구의 불모지인 국내에서 이들이 정식으로 뿌리 내리기까지의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난의 중심에는 ‘최초’ 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수식어를 달아야하는 안향미 감독(현 선라이즈 여자 야구단 감독)이 있었다. “어렸을 땐 아무 것도 모르고 야구가 좋아서 했는데 이제는 어느덧 책임감이 느껴진다” 는 27살 안향미 감독의 파란만장한 야구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안향미 감독이 처음 야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틀야구단에서 야구를 했던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이 그녀의 인생에 변화를 준 장본인이었다. 원체 운동을 좋아했던 안향미는 초등학교 때 테니스 선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남동생이 어느 날 밤 9시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경찰에 신고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나 보고 테니스가 끝나면 동생을 기다렸다가 함께 집에 오라고 하셨다. 매번 동생을 기다리며 야구를 구경하다가 흥미를 가지게 됐다.”
그 후 테니스와 야구를 병행했지만 학교 테니스부가 해체되는 바람에 안 감독은 야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여자 중학교에 진학한 안향미는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경원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정식 경기에서 주전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내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 남자 선수들에 비해 기술적 면이나 체력에서 뒤처졌고 특히 근력에서는 도저히 그들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게는 우연히 찾아오는 한 타석, 한 타석이 소중했고 그라운드에 설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
굴곡 많았던 고교시절
중학교를 졸업하고 덕수정보고등학교에 어렵사리 입학한 안향미. 중학교 때와 달리 공식경기에서 단 한 번도 그라운드에 나서지 못했지만 그녀에게도 봄날은 왔다.
“98년 대구로 전지훈련을 갔을 때였다. 당시 대구의 모 고등학교와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3학년이 모두 졸업한 시점이라 투수가 부족했다. 남자 동기가 잘 던지고 있었는데 마무리로 내가 마운드에 올랐고 공 몇 개 던지지 않았는데 팀 타선이 점수를 뽑아줘서 승리 투수가 됐다.”
안향미는 비록 공식경기가 아닌 팀 연습경기 밖에는 출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마음껏 뛸 수 있는 그라운드가 있었다. 그녀의 고교시절에도 위기는 있었다.
“고교시절 새로 부임했던 감독님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미워하셨다. 심지어는 경기에 나설 때 야구부는 학교버스로 움직이는데 나만 남겨두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학부모님들과 선수들이 모여 매년 갖는 야구부 고사에서도 ‘여자가 고사지내면 부정탄다’면서 어머니와 함께 다른 방에 있게 했다. 정말 내가 이러면서까지 이걸(야구를) 꼭 해야 하냐는 의구심이 들었고 석 달 동안 야구를 그만뒀다.”
그러나 그녀를 괴롭히던 감독은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좋지 않은 문제로 학교를 떠나게 됐다.
“야구를 그만둔 석달 간 야구가 내 인생에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알게 됐다. 매일 60바퀴씩 돌던 그라운드가 어찌나 그립던지….”
안향미는 감독이 바뀌면서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는 그라운드의 소중함을 깨닫고 더 열심히 운동에 매진했다. 고 3이던 99년 꿈에도 바라던 공식경기 출전의 소망도 이뤘다.
“대학진학을 우려한 감독님의 배려로 나설 수 있었던 경기였다. 당시 배명고와 준결승 경기였는데 선발 투수로 나섰다. 공 하나를 던지고 내려와야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그때 처음 알았는데 선발투수는 반드시 한 타자를 상대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던 것이다. 심판이 벤치로 내려가는 나를 막았고 결국 그 타자를 맞춰서 출루시켰다.”
그녀는 고교시절 내내 팀 동료이자 선의의 경쟁자였던 남자선수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악착같이 그들과 같은 양의 훈련을 소화해냈다.
‘최초’라는 수식어의 부담
안향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남자야구의 높은 벽에 부딪혀 대학 입학에 실패하게 됐다. “여성용 탈의실이나 샤워실을 저로 인해 새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말 약속이나 한 듯 모든 대학에서 나를 뽑지 않은 게 그 이유였다. 차라리 실력이 안 된다고 솔직히 이야기했으면 후련한 마음이나 들었을 것이다. 중·고교 6년 동안 내 개인의 탈의실이나 샤워실을 가져본 적도 없이 남자들과 공동으로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안향미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 미국여자 야구협회 소속의 한 팀에서 초청장이 날아왔다. 숙식을 제공하고 기
본 생활비도 지급되는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비자 문제가 결정적인 걸림돌이었다. 팀 초청장이 무용지물이 되자 협회차원에서까지 초청장을 보내왔지만 갈 수 없었다. 신분이 확실치 않다는 이유였다.
그녀는 결국 미국행을 포기하고 2002년 일본으로 갔다. 2002년부터 일본 여자야구협회 소속 팀이었던 드림윙스에 투수 겸 3루수로 입단한 그녀는 야구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당시 팀의 감독님이 협회 회장도 겸하고 있으신 분이셨다. 그분이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팀을 운영하고 협회회장도 하시는 걸 보고 느낀 점이 참 많았다.”
2003년 일시 귀국한 그녀는 일본에서 느낌 점을 토대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꿈에도 그리던 한국 최초의 여자야구단 창단이었다.
“그때 당시 내겐 어느덧 책임감이 생겼다. 최고는 누구나 도전할 수 있지만 최초는 나밖엔 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자야구단의 출발은 포털사이트의 인터넷 카페에서 야구를 할 사람을 모으는 일부터였다. 한 살 어린 동생에게 카페 운영을 맡기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그러던 중 남동생이 군 입대 문제로 카페 운영을 할 수 없었다.
“배신 당해도 쓰러지진 않아”
결국 2003년 12월 일시 귀국해서 운영자를 찾기 위해 카페 정모를 했다. 당시 정모에 참석한 사람은 총 세 명. 그 중 한 명은 고등학교 때부터 팬레터를 보내와서 알게 된 친구 A였다. 그런데 이후 A가 배신하면서 참 힘든 나날을 겪어야 했다. 2004년 3월, 팀 명칭 공모에 의해 ‘비밀리에’라는 정식 팀명이 정해졌고 마침내 국내 최초의 여자야구팀이 창단됐다. 그러나 ‘비밀리에’ 는 곧 심한 내분에 휩싸이게 됐다.
정모 후 팀을 창단하면서 선수모집을 목적으로 만들었던 카페 운영을 A에게 맡겼다. 그리고 팀 창단에 맞추어 2004년 3월 귀국했다. 첫 훈련이 있던 날 안향미는 심한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야구만 알았던 내게는 전혀 비상식적인 팀 훈련이었다. 당시 야구 선수시절 은사들을 감독으로 내정했지만 훈련은 뒷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카페를 통해 모집한 여자 선수들과 여기저기서 끌어들인 남자 서포터스들이 함께 음주가무를 즐기는 등 분위기가 많이 문란했다.”
결국 그녀는 정말 운동을 하고 싶은 사람만을 추리기로 했다.
“운동하고 싶은 사람은 따라 나오라고 했더니 3분의 1만 나왔다. 당시 한 선수는 내가 너무 독단적이고 강해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몇 년을 지켜본 그 선수가 그러더라. 알고 보니 야구할 때만 독하고 마음이 너무 여리다고 했다.”
2004년 7월 안향미는 팀에 흐르는 묘한 기류의 중심에 A가 서있는 것을 알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A는 나를 배신했다. 당시 ‘비밀리에’카페의 운영권을 쥐고 있던 A는 나를 비롯해 나와 함께 나온 선수들을 카페에서 강등시켰다.”
결국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야구팀인 ‘비밀리에’의 팀명을 놓고 벌어졌던 안향미와 A의 갈등은 A의 승리로 끝나게 됐다. A가 ‘비밀리에’를 특허신청해버린 것.
“참 어이가 없었다. 마치 소작농이 대신 농사를 지었으니 주인의 땅을 뺏어도 된다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일이었다. 친구의 입에서 ‘비밀리에’라는 명칭이 나왔지만 ‘비밀리에’를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만든 것은 나였다.”
야구 밖에 모르는 바보
안향미는 결국 2006년 11월 ‘비밀리에’라는 국내여자야구의 상징적 이름을 포기하고 뜻을 같이하는 선수들을 모아 ‘선라이즈’라는 팀을 결성했다. 그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일을 이루고야 말았다.
“정말 꾸준히 KBO야구관계자들에게 연락하고 찾아갔는데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이광환 현 WBAK 부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찌나 고맙던지. 결국 KBO의 지원 아래 여자야구연맹이 창단됐다.”
배수호 4477b@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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