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다. 한숨부터 나온다. 47년만에 아시안컵 정상 재등극을 꿈꾸고 있는 핌 베어벡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사령탑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졌다.
지난 2월 영국 런던에서 있은 그리스와의 평가전에서 1-0 쾌승을 올렸다는 기쁨도 잠시, 불과 한달여만인 3월24일, 서울 상암에서 열린 올 첫 국내 A매치 우루과이와의 평가전에서 헛심 공방 끝에 0-2로 패한 것. 내용이 더 충격적이었다. 모든 면에서 총체적 난조를 보였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해외파의 뒤늦은 합류로 파주NFC에서 26명 엔트리가 모두 모여 손발을 맞춘 시간은 고작 이틀. 조직력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포지션이 각개 전투로 시작해 각개 전투로 끝났다. 베어벡 감독도 이를 순순히 인정했다. 종료 휘슬이 울린 뒤 침통한 얼굴로 인터뷰 룸에 들어선 그는 “한박자 빠른 볼처리와 패싱, 상대 뒷공간을 파고드는 움직임 등 모든 게 부족했다”고 아쉬워했다.
이날 경기에선 수비 조직의 문제가 대두됐다. “디펜스가 크게 흔들렸다”고 평가한 베어벡 감독의 말처럼 한국 축구의 위태위태한 수비는 상암 월드컵경기장을 찾은 4만2,000여 홈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줬다.
베어벡 감독 부임 이후 대표팀 메인 포메이션으로 자리잡은 4-2-3-1 진용의 포백 수비는 갈팡질팡 위치를 찾지 못하고 허둥댔다. 언제 어떤 타이밍에 전진해야 하는지, 뒤로 빠져야 하는지 갈피를 못잡았다. 2차례 실점은 모두 여기서 기인했다.
전반 19분 문전 오른쪽 모서리에서 푸시레가 띄운 크로스를 골 에어리어 중앙의 부에노가 슈팅으로 연결할 때 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른쪽 풀백 오범석과 센터백 김상식은 뒷걸음질 치느라 볼을 차단할 여유가 없었다.
김정우와 함께 ‘더블 보란치’를 담당한 이호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페널티 외곽에서 레코바가 푸시레에게 볼을 연결한 순간, 이호는 제 임무를 잊고 커버를 하지 않았다. 허겁지겁 디펜스에 가담했으나 때는 늦었다.
전반 37분경의 두 번째 실점도 수비 실책이 원인이었다. 왼쪽 측면의 이영표가 오버래핑으로 수비 가담이 늦어진 틈을 우루과이는 놓치지 않았다. 미드필더 카노비오가 우리 디펜스 뒷공간을 향해 길게 찔러준 스루패스를 부에노가 잡아 추가골로 연결했다.
당연히 허술한 수비 조직력에 대한 질책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비록 실수를 범하긴 했으나 이영표를 제외하곤 딱히 안정을 주는 수비수가 없다는 점은 베어벡 감독의 용병술에 의문 부호(?)를 던졌다. 특히 오래전부터 지적돼 온 센터백 듀오 김상식-김동진 조합은 더 그랬다. 이들이 전문 수비수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 공격수와 자리싸움에서 밀리고, 볼처리가 미흡하다는 한 원로 축구인의 지적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경기후 이영표는 믹스트존에서 기자들에게 “이들은 우리 팀 최고의 스토퍼”라며 “감독의 선택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지난해 9월 이란과 아시안컵 지역예선 서울 홈경기(1-1)를 기점으로 시작된 이들 조합의 안정감은 아무래도 떨어진다.
불필요한 횡패스 남발
대표팀은 K리그를 배워야 할 것 같다. 올시즌 K리그는 시원한 골 폭풍이 연일 몰아치며 필드를 후끈 달구고 있다.
특히 세뇰 귀네슈(FC서울), 앤디 에글리(부산), 파리야스(포항) 등 외인 사령탑들은 물러설 줄 모르는 정열적인 공격 축구로 팬들에게 강하게 어필한다.
그러나 대표팀은 시종 무기력한 경기로 일관했다. 불필요한 횡패스와 후방 패스를 남발했고, 문전에서의 마무리도 이뤄지지 못했다. 아니, 전혀 찬스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앙 루트는 아예 사라졌다. 문전에 진입한 뒤에도 굳이 외곽으로 빠져나와 크로스를 올리는 모습은 서글플 지경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박지성이 버틴 왼쪽에 한정됐다. 반대편의 설기현은 최근 소속팀에서의 잦은 결장을 대변하듯 시종 무기력했다.
그는 종료 직전 슈팅이 크로스바를 때린 것을 포함해 ‘슈팅 1개-크로스 3개’의 허무한 플레이로 일관했다.
이같은 단조로운 측면 공격은 플레이메이커의 편중된 움직임에서 기인했다. 물론 중원 꼭지점을 맡은 이천수의 활약은 나쁘지 않았다. 이천수는 후반 시작과 함께 김두현이 투입되기 전까지 플레이메이커로 뛰며 줄곧 왼쪽 사이드에서 박지성과 호흡을 맞췄다. 여기에 이영표 특유의 오버래핑이 더해져 시너지 효과를 냈다.
우루과이를 이끈 타바레즈 감독은 “한국의 왼쪽이 강했다”면서도 “그러나 오른쪽 측면은 큰 의미가 없었다”고 한쪽에 편중된 공격 루트를 지적했다. 베어벡 감독은 측면 플레이의 단조로움을 꼬집는 물음에 “전적으로 동감한다”면서 “이틀간의 훈련으로 부족했다. 선수 스스로 보완해야 한다. 그래도 부족하면 더 좋은 선수를 찾겠다”고 했다.
박지성 대신 김두현이 투입돼 플레이메이커로 나섰으나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견고한 상대 수비를 뚫지 못해 주변을 맴도는 플레이는 여전했다. 수비를 끌어내려는 시도도 없었다. 상대 디펜스가 강할 때는 과감한 중거리 슈팅으로 조직을 흩트리고, 공간을 찾아야 하는 게 기본 이치지만 이러한 의지가 없었다. 베어벡 감독도, 코칭스태프들도 전술적 변화를 통해 반전을 꾀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중앙 공략은 대 실패였다.
대책은 무엇?
걱정이 태산이다. 오는 7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릴 07 아시안컵을 앞두고 대표팀에 주어진 기회는 꼭 한 경기. 6월2일 상암에서 있을 네덜란드와의 평가전이 전부다.
그래도 다행스런 점은 이 시기에 우루과이전서 빠진 해외파 및 K리그 일부 선수들이 모두 합류할 수 있다는 것. 베어벡 감독은 우루과이전을 앞두고 프리미어리그 미들스브러의 이동국과 반년간의 야인 생활을 마치고 수원 삼성으로 컴백한 안정환이 소속팀에 빨리 적응하도록 엔트리에 합류시키지 않았다. 대표팀과 올림픽팀을 오가는 박주영도 불러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네덜란드와의 경기는 대표팀 선수들이 모두 모여 손발을 맞출 수 있는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인만큼 베어벡 감독도 우루과이전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배웠다”면서 “전술적 훈련없이 선수들에게 명확한 지시를 내리기 어렵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고 미흡한 준비가 이번 패배를 불러왔음을 시인했다.
우루과이전에 대비해 파주에서 소집 훈련을 했을 때 “선수들의 컨디션 문제로 회복에 주안을 뒀다”고 말하는 등 여유를 보인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만큼 다급해졌다.
베어벡 감독은 조직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합숙 훈련을 고려중이다. 일단 유럽에서의 시즌이 끝나고, 해외파 선수들이 귀국하면 K리그 일정을 고려해 소집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다.
그러나 걸림돌은 또 있다. 선수 개개인의 컨디션이 제각각이기 때문. 유럽 리거들은 엄청난 경기량으로 지칠대로 지쳐있고, 국내에서 뛰는 선수들 또한 컵 대회와 K리그 일정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올림픽호에서도 뛸 일부 젊은 선수들의 체력은 더욱 고민이다. 최상의 컨디션을 맞추는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베어벡 감독은 “나도, K리그 지도자들도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고충을 털어놓았다.
과연 아시안컵 우승을 위해 베어벡 감독이 꺼내들 대안은 무엇일까. 갈 길 바쁜 베어벡호다.
#공언은 공언에 불과?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핌 베어벡 감독이 말을 바꾸는 것인지, 아니면 통역 과정에서 의미가 명쾌히 전달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루과이전을 하루 앞둔 지난달 23일, 그라운드 적응훈련을 마친 뒤 이어진 기자 회견에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연출됐다.
근래 컨디션이 좋은 박주영(FC서울)과 안정환(수원 삼성)을 빼고, 소속팀에서 난조를 보이고 있는 설기현(레딩FC)과 이호(제니트)를 선발한 이유를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베어벡 감독이 “소속팀에서 뛰지 못한다고 해서 뽑지 않는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던 것.
순간 취재진들은 웅성거렸다. “그럼, 안정환하고 이운재는 뭐야?”
작년 아시안컵 예선을 준비하던 베어벡 감독은 안정환이 소속팀 없이 개인훈련만 하고 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제외시켰고, 수년간 대표 수문장으로 명성을 떨친 이운재를 팀내 경기력이 변변찮다고 출전시키지 않았다.
결국 베어벡 감독은 설기현과 이호를 선발하며 소속팀에서의 활약이 대표 선발의 잣대가 된다는 ‘선발 원칙’을 스스로 깨버린 셈이다.
또 “소속팀에서 활약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활약이 없는 선수를 뽑지 않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아리송한 대답을 덧붙였다.
정말 베어벡 감독은 자신의 말이 바뀔수록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걸 모르는 걸까. 결국 지난해 그의 공언(公言)은 공언(空言)에 불과했다.
##대표팀과 올림픽팀 비교 - “형보다 아우가 낫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지만 우리는 아우만한 형이 없는 것 같다. 대표팀이 우루과이전에서 대패, 뭇매를 맞는 것을 보고 깨달았기 때문일까. 올림픽호는 지난 3월28일 안산 와~스타디움서 열린 우즈베키스탄과 08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 3차전에서 호쾌한 2-0 승리를 거뒀다. 예멘-UAE전에 이어 3전 전승.
같은 사령탑의 지휘를 받지만 동생들의 모습은 형들과는 판이했다. 내용부터 달랐다. 특히 측면 공략이 인상적이었다. 어린 선수들은 과감한 몸
놀림과 스피디한 플레이로 우즈벡를 괴롭혔다.
전반 33분 터진 한동원의 첫 헤딩골은 이근호의 날카로운 왼쪽 크로스에서 비롯됐다. 허망한 크로스로 일관한 형들과는 대조적인 모습. 후반 39분 한동원의 통렬한 중거리포도 여기서 시작됐다. 최철순의 크로스를 수비가 어설프게 걷어내자 아크 오른쪽에서 그대로 슈팅으로 연결한 장면은 일품이었다.
디펜스도 안정됐다. 패스 한방에 뒷공간을 내줘 허둥댔던 형들과는 달리, 강한 압박과 빠른 수비 가담으로 상대에게 좀처럼 기회를 허락지 않았다.
확실하고 끈끈한 올림픽호의 조직 축구와 새로운 해결사로 나선 한동원의 활약에 안산벌은 달아올랐다. 다만 ‘크로스-세컨볼-슈팅’의 단조로운 공격 패턴이 아쉬웠을 뿐.
베어벡 감독도 모처럼 웃었다. 그는 “추가 득점이 안터져 안타깝지만 만족한다”고 했다. 또 한동원과 이근호 등 나날이 성장하는 새내기들에게도 “대표팀에 충분히 선발될 기량을 가졌다”며 희망을 줬다. 대표팀 형들은 좀 더 긴장해야 할 것 같다.
상암·안산:남장현 yoshike3@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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