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드서 만난 ‘앙팡 테리블’ 고종수, 비상을 꿈꾼다!
스탠드서 만난 ‘앙팡 테리블’ 고종수, 비상을 꿈꾼다!
  • 대전=남장현 
  • 입력 2007-05-03 10:28
  • 승인 2007.05.03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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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만 유독 관심이 쏠리는 것 같아 부담스럽네요.” 정말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예전의 모습은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었다. 검게 그을린 야윈 얼굴과 듬성듬성한 수염이 요즘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앙팡 테리블’ 고종수(29·대전 시티즌)를 만난 것은 초록 필드가 아닌 관중석이었다. 익숙지 않은 모습. 유니폼 대신 붉은 티셔츠를 입고, 회색 팀 재킷을 무릎에 덮은 그는 언론 노출이 부담스럽다며 한사코 카메라를 외면했다.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불던 지난 4월25일 대전 월드컵경기장. 엔트리에 포함되지 않은 팀 동료들과 옹기종기 모여앉아 친정팀 수원삼성과의 K리그 컵 대회를 지켜보던 고종수는 더 이상 스타가 아닌 한명의 평범한 선수였을 뿐이었다.



고종수는 요즘 무척이나 괴롭고 답답하다. 무려 3년간의 공백을 깨고, 새로운 도약을 꿈꿨지만 허벅지 부상이 괴롭히고 있다. 올 시즌 전반기 복귀도 사실상 물 건너갔다.
한시라도 빨리 필드로 나가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몸이 따르지 않고 있다. 왼쪽 허벅지 안쪽이 말썽이다. 정밀 검진 결과 임파선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상황은 좋지 않다.


◆ “필드에 서고 싶다”
지난 3월 중순 복귀가 유력해 보이던 고종수는 출전을 앞둔 3월27일 팀 훈련 도중 왼쪽 사타구니 부상을 입고 복귀를 늦춰야 했다. 하지만 부상은 끊이지 않았다. 수원으로 올라가 검진을 받은 뒤 별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4월8일 다시 선수단에 합류해 개인 훈련을 시작했으나 팀 훈련 합류 사흘만인 19일 똑같은 부위에 부상을 입었다. 최소 3주 이상 안정을 취하고, 무리한 운동을 피하라는 결과가 나왔다.

“팬들께 죄송스럽죠. 저도 빨리 경기에 출전하고 싶어요. 뭔가 보여주고 싶은데….”

사실 고종수가 이 부위를 다친 것은 처음이다. 처음 다쳤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당시 진단 결과도 나쁘지 않았고, 조깅 등 가벼운 개인훈련도 할 만했다. 하지만 또다시 찾아온 통증. 복귀시기를 당기고싶은 마음에 급하게 서두른 게 화근이었다.

볼을 차는 순간,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낀 고종수는 곧바로 훈련을 멈추고 대전 시내 구단 지정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다. 다시 엄습한 부상의 그림자.

요즘 고종수는 물리 치료와 함께 심리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팀에서는 상체를 만들기 위한 웨이트 트레이닝만 한다. 최윤겸 대전 감독은 “나도 괴롭지만 본인이 가장 속상할 것”이라며 “출전하고싶은 욕심이 너무 강했다”고 안타까운 심경을 드러냈다. 심리 치료를 받게 한 것도 이런 아픔
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기 위한 구단의 세심한 배려다.

언론과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하고, 기피하는 것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주먹을 꼭 쥐고 그라운드를 응시하는 고종수의 눈빛은 분
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화려한 골도 아니고, 어시스트도 아닌 ‘부상회복’과 ‘출전’이었다. 간단하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소망이다.


◆ “난 변했다”
“후퇴는 없어야죠. 다 잊고 새로이 시작하고 싶어요.”

그동안 고종수를 따라붙는 수식어는 정말 다양했다. 전성기 때 옛 소속팀 수원 서포터스 그랑블루에게 얻었던 앙증맞은 애칭 ‘앙팡 테리블’부터 ‘트러블 메이커’‘이슈 제조기’까지.

닉네임이 많다는 것은 고종수가 얼마나 한국 축구에 큰 영향을 준 존재였는지를 대변해준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고종수는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다. 그저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는 여린 부상 선수에 불과하다.

예전처럼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꼬리말처럼 따라붙던 ‘음주’ ‘무절제’란 말도 사라진지 오래다. 최윤겸 감독 등 대전 구단 관계자들도 하나같이 “고종수가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걸걸한 성격도 훈련 때만 제외하고 조용해졌다니 완전히 180° 변했다.

금호고를 졸업하고 96년 수원에 입단한 고종수는 이동국(미들스브러), 안정환(수원)과 함께 트로이카 3인방 체제를 구축하며 98년 찾아온 K리그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이다. 2001년에는 AFC(아시아축구연맹)이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도 수상할 정도로 기량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화려한 시절은 그리 길지 못했다. 고종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너졌다. 누구나 찾아오는 슬럼프가 아니었다.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던 그는 음주가무를 즐기고,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아픔의 시작이었다.

03년 9월 일본 J리그 교토 퍼플상가에서 6개월만에 쫓겨나다시피 국내로 복귀한 고종수에게 기회를 준 것은 전남 드래곤즈 허정무 감독이었다.

2005년 전남에 입단했지만 여기서도 고종수는 재기하지 못했다. 허 감독과는 자주 마찰을 빚었고 방탕한 생활은 계속됐다. 결국 전남도 그와의 재계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에 거의 출전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누구도 고종수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독일월드컵이 열렸던 작년 한해는 그에게 암흑과도 같았던 시간이었다. 별의별 루머들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서울 청담동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한다느니, 식당 경영자가 됐다느니 등 각종 얘기가 흘러나왔다.

모두가 냉소적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선수가 운동도 안하더니 잘됐다’ ‘재기는 꿈도 꾸지 말라’는 등 악플들이 고종수를 괴롭혔다.

하지만 고종수는 축구 선수였다. 한물갔다는 얘기가 그를 자극했다. 그라운드 냄새를 잊을 수 없어 다시 축구판으로 돌아왔다. 새로이 찾은 둥지가 바로 대전 시티즌. 최윤겸 감독과 이영익 수석 코치도 돌아온 옛 스타를 흔쾌히 받아줬다.

입단식에서 고종수는 “예전의 선수로 거듭나겠다. 믿고 지켜봐달라”고 재기를 굳게 다짐했다. 계약금도 없이 연봉과 관련한 일체를 구단에 위임했음은 물론이다. 선수단 숙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방을 구해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90kg을 훌쩍 넘는 최악의 몸상태로 참가한 사이프러스 팀 전지훈련. 이를 악물고 훈련을 거듭한 고종수는 지금 76kg 정도까지 몸무게를 줄였다. 가벼운 조깅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던 그였지만 최근에는 슈팅이나 패싱, 프리킥 등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을 정도가 됐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부상이 안타까울 따름.

최 감독은 “복귀를 눈앞에 두고 이렇게 부상을 입었으니 하늘도 무심하네요”라며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분명 희망은 있다. 지금은 최소 ‘미운 오리새끼’가 아니라는 게 어느 정도 입증되고 있으니 말이다.


◆ “틀림없이 성공한다”
고종수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참으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낙관할 수도, 그렇다고 무작정 비관할 수도 없는 게 현상황이다. 그래도 근래 고종수를 지켜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재기를 긍정하고 있었다. 프런트부터 코칭스태프, 동료들 모두가 고종수의 의지를 칭찬했다. 이런 내부 분위기를 의식한 듯 당초 고종수 영입에 물음표를 던졌던 사람들도 마음이 많이 바뀌고 있었다.

이윤원 대전 구단 사장과 권도순 이사는 “걱정했는데 무난히 적응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하고자하는 뜻이 강하다”라며 굳은 믿음을 보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고종수를 지켜본 코칭스태프들의 의견도 마찬가지다. 최윤겸 감독은 “어떤 훈련을 시키더라도 불만없이 따라온다. 재활 기간을 잘 마치면 틀림없이 예의 기량을 80% 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영익 수석코치도 “열심히 하고 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트레이닝을 비교적 무난하게 소화하고 있다”고 근황을 설명했다.

팀 동료들은 한결같이 고종수가 선수단에 있다는 것에 만족해하는 분위기다. 키퍼 최은성처럼 최고참부터 올해 막 입단한 신예까지 고종수에게 후한 점수를 줬다. 언론 접촉은 피해도 언제나 분위기를 주도하고, 리더십으로 후배 선수들을 이끌어주는 다정한 선배다. 최은성은 “매사 적극적이다. (고)종수가 온 뒤 후배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느낀다”고 전했다.

고종수도 “저를 많은 분들이 걱정하지만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다”면서 “재활에 몰두하는 지금으로선 좀 더 기다려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지만 잘 해낼 자신이 있다”고 했다. 전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참히 무너지지 않겠다는 자기 암시다.

그렇다면 고종수는 완전히 방탕한 생활을 접었을까. 솔직히 말해 아직 완전한 금주 상태는 아니다. 가끔씩 외롭거나 힘들 때 알코올을 조금씩 찾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술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알코올 중독자’나 ‘폐인’이 될 정도는 아니다. 예전과는 분명 다르다. 운동 선수들이 수도승은 아니기 때문에 무작정 금욕과 절제만을 강요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열린 생각인지는 몰라도 허용된 범위에서 적당한 음주는 오히려 스트레스를 해소해줄 수 있다는 게 구단 관계자들 대부분의 견해다. 한 코칭스태프는 “아직 (말썽을 피웠다는)정보는 들어오지 않았다”라며 “그래도 성인인만큼 자기 본인이 잘 챙길 것으로 생각한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화려한 비상도 아닌 평범한 재기를 꿈꾸는 고종수. 붉은색 레플리카를 입고 다시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그날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그에게 운명의 여신은 어떤 결과를 안겨줄까. 시즌 후반기 레이스가 돌입될 오는 8월,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수 계약서 프로선수 중 가장 복잡

왼쪽 허벅지 부상으로 그라운드 복귀 시기가 오는 6월께로 늦춰진 가운데 고종수와 현소속팀 대전시티즌 구단간의 다양하고 복잡한 계약 옵션들이 관심을 끌고 있다.

이미 알려진대로 고종수는 자신의 연봉을 구단측에 일체 위임했다. 전에 몸담았던 전남과 계약이 정리됐기 때문에 별도 계약금없이 대전에 입단할 수 있었다.

고종수의 기본 수당은 그리 많지 않다. 대신 출전 수당이나 공격 포인트 수당 등 기타 옵션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월등히 많다. 더 재미있는 것은 출전 수당이 분 단위로 나눠져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몇분 뛰고, 어떤 포인트를 기록했을 때 얼마를 준다’는 내용까지 상세히 명시돼 있다. 좀 과장해서 A4용지 수십장 분량이라니 알 만하다. 데닐손같은 용병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게 구단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한 프런트는 “(고종수)계약서가 K리그에서 가장 복잡하고 다양할 것”이라며 웃는다.

하지만 재활치료중인 지금, 고종수는 월 200만원 가량만을 받고 있을 뿐이다. 팀에 아무 공로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황송할 지경이다. 한때 엄청난 몸값을 자랑했던 고종수다. 예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출전을 해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다.


##‘내가 있을 곳은 바로 그라운드’

부상 중인 고종수가 소속팀 대전과 친정팀 수원의 K리그 컵 대회 경기를 스탠드에서 관전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 무작정 찾은 지난 4월25일 대전 월드컵경기장.

킥오프되기 10여분전인 오후 7시20분, 이날 경기 출전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한 대전의 몇몇 선수들이 경기장 미디어석 상층 스탠드로 모습을 드
러냈다. 회색 코트를 걸친 고종수도 이들 사이에서 함께 자리를 잡았다. 검은 피부와 탄탄한 체격은 여전했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린 게 조금은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드디어 미션 돌입. 오랜만의 대면은 수월치 않았다. 악수를 청하자 한번 힐끗 쳐다보고 신분을 확인한 고종수는 “할 말이 없다”고 한사코 외면한다. 계속 인터뷰를 거절하는 그에게 카메라를 가까이 내미는 것 역시 고역이었다.

초췌하고 피곤기 가득한 얼굴이 촬영되는 것을 회피한 고종수의 모습에서 요즘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특유의 자신감도 온데간데 없어보였다.

그러나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눈빛이 달라졌다. 주먹을 꼭 쥐고 때론 즐거움에, 때론 안타까움에 쉴 새 없이 중얼중얼 혼잣말을 내뱉으며 관전에 몰입했다. 너무도 진지해서 뭔가 질문하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불꽃 튀던 90여분의 승부가 결국 1-1로 종료되자 입을 굳게 다문 채 라커룸으로 내려가는 그의 표정은 한 가지 분명한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종수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스탠드가 아닌, 바로 초록 그라운드라는 사실을….


대전=남장현  yoshike3@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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