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힐 듯 팽팽한 긴장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다. ‘탁탁’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만이 정적을 깰 뿐이다.
양궁 국가대표 2차 평가전이 열린 지난 5월17일 태릉선수촌 양궁장. 오는 7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펼쳐질 07 세계 양궁 선수권에 나설 6명을 선발하기 위해 남녀 대표 16명은 치열한 우중(雨中) 사투를 벌였다. 이날 평가전에서는 출전자 2명과 탈락자 2명이 최종 결정됐다. 남자부 임동현(21·한체대)과 여자부 최은영(23·청원군청)이 출전 선수로 뽑혔고, 이철수(24·상무)와 김문정(26·청원군청)은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장영술 남자 감독(47·상무)과 문형철 여자 감독(49·예천군청)은 “당일 컨디션 문제다. 선발된 선수든, 탈락한 선수든 실력에 별 차이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08 베이징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세계 선수권을 준비하는 두 감독을 만나 한국 양궁이 처한 상황, 목표와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가 걱정
“양궁이 효자 종목으로 남기 위해선 언론과 팬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이 거센 비를 맞아가며 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문형철 감독은 지금 한국 양궁에 가장 필요한 부분이 ‘관심’이라고 말했다.
국내 도입 40여년에 불과한 양궁은 84 LA 올림픽부터 04 아테네 올림픽까지 매 대회 2개 이상의 금메달을 한국 선수단에 안겨준 효자종목.
그러나 양궁은 철저히 외면을 받아왔다. 4년에 꼭 한번,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 큰 국제 대회를 앞두고 반짝 관심을 보일 뿐이다. 월드컵이나
세계 선수권은 존재감도 없다.
문 감독은 “양궁이 본래 고독한 종목인데, 관심마저 없으니 더 외로운 느낌이다”며 “가끔 이런 환경에서 뛰는 선수들이 가여워진다”고 하소연했다.
지원도 넉넉지 못하다. 풍족한 생활은 꿈도 꿀 수 없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 국가 유공자가 되면 모를까, 선수 대부분이 어려운 여건에 놓여있다. 대표 선수들 상당수가 100만원에 불과한 실업팀 급여를 받으며 생활한다. 대표팀에 합류해도 훈련수당 명목으로 하루 2만3,000원 가량 받는 게 전부다.
반면 장비는 고가다. 국산 활이 250만원에 육박하고, 소모품인 화살도 개당 5만원이다. 어지간한 형편으로는 양궁을 시작하기 어렵다.
선수층도 얇다. 문 감독은 “비인기 종목이라 선수를 제때 수급하는 것도 어렵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선수 격려차 양궁장을 찾은 서거원 대한양
궁협회 전무의 말을 빌리자면 국내 등록 선수가 500~600명인데, 일본만 해도 오사카 시협회에 등록된 선수가 900명이 넘는단다. 서 전무와 문 감독 모두 현재 인프라에서 이만한 성과를 올린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는 생각이다. 관심을 통 못받다보니 양궁인 사이에서 ‘해봐야 뭘해’라는 자조섞인 매너리즘도 나온다고 지적했다.
문 감독은 한국 양궁의 위기 시점을 내년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금은 국내 64강에만 들어도 세계적 수준이지만 08 올림픽 이후부터는 좋은 성적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열악한 여건속에 유소년들이 양궁을 시작하는 것을 꺼리고, 우수 지도자들은 좋은 곳을 찾아 해외로 나가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의 해외 진출을 국부 유출이라고까지 표현한 문 감독은 “양궁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지금껏 버텨왔지만 한계에 부딪혔다”면서 “잘해야 본전, 못하면 역적이 되는 국내 정서와 무관심이 양궁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힘들지만 우린 그래도 쏜다
세계는 규정까지 바꿔가며 한국 양궁을 견제한다. 18발씩 쏘던 개인전 룰을 12발로 낮춘 것이나 3명이 나서는 단체전 룰을 27발에서 24발로 줄인 것은 쏠수록 집중력을 발휘하는 한국 선수들에게 불리하다. 한때 ‘제왕’으로 군림했던 러시아와 폴란드, 미국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고
호주와 영국도 강국으로 떠올라 한국의 아성을 위협한다.
위기를 느낀 한국도 보다 튼실한 선수 선발과 혹독한 훈련법으로 현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힘에 부친다. 들인 노력에 비해 대가가 적다.
평가전 내내 자리를 뜨지 않던 장영술 감독은 “아마추어 종목에도 병역면제 혜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올림픽 3위 이상 입상 시 주어지는 병역면제를 위해 양궁 선수들은 사활을 건다. 월드컵 16강, WBC 4강 등 다양한 혜택을 누리는 타 종목과는 전혀 다른 처우다.
장 감독은 “주어진 환경이 다른데 이래서야 선수들이 어떻게 훈련에 매진하겠느냐”며 서운함을 표출했다. 서거원 전무도 “소외감을 느끼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사실 양궁인들은 작년 초 여타 아마추어 종목 관계자들과 함께 세계 선수권 우승자만이라도 면제 혜택을 받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준비했었다.
그러나 연예인들이 기준없는 ‘한류스타’를 내세우며 면제를 요구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됐다. 정부와 대한체육회의 어설픈 행정이 가져온 결과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설움. 그러나 장 감독은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일단은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세계 선수권 우승. 견제 세력이 많아 철저한 준비가 요구된다. 문형철 감독과 함께 남녀 개인전, 단체전 모두를 휩쓴다는 생각이다. 부담도 크다.
장 감독은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렵다”며 미소를 보인다. “대회마다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라는 문형철 감독도 “비슷한 실력의 국가들과 상대해야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올해 한국 양궁은 매우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한다. 양궁 월드컵 3, 4차 대회 및 파이널 라운드를 치르고, 아시아 선수권과 프레 올림픽에도 출전한다.
어려운 여건에서 ‘정상의 마이 웨이’를 이어가는 한국 양궁의 선전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남장현 yoshike3@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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