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째 한국인 프리미어리거 탄생이 초읽기에 들어간 듯한 분위기다. 영국 프로구단으로 이천수의 이적이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천수에게 관심을 보인 구단은 런던 외곽에 위치한 풀럼. 지난 5월18일 LG전자와 유니폼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한 풀럼은 이천수의 임대 및 이적료를 놓고 현소속팀 울산과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적료 등 금전적 조건에서 양자의 입장차가 만만찮다. 또 국내 에이전트 문제가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고, 풀럼이 지정한 현지 에이전시 창구를 담당한 인물의 실체도 불분명하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희망하는 ‘미꾸라지’ 이천수(26·울산현대)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복잡한 에이전트 관계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창구가 단일화되지 않으면 혼선을 빚는 것이 당연하다. 이천수의 상황이 바로 그렇다. 대외적으로 ‘난립’한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에이전트 관계가 복잡하다.
이천수는 개인 에이전트와 울산에서 위임한 팀 에이전트가 따로 있다. IFA스포츠(대표 김민재)가 개인 에이전시로 활동하고 있고, 울산은 지쎈(대표 김동국)을 대리인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각자 입장이 있고,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풀럼과의 협상에서 혼선을 빚었고, 언론과 팬들은 ‘사공이 너무 많다’며 거센 비난을 퍼부었다. IFA나 지쎈 모두 이같은 반응에 섭섭하다는 입장이다. 이천수의 이적을 추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난립’한다는 인상만 심어줬기 때문이다.
IFA 관계자는 “풀럼이 한국 선수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소식을 접하고, 재빨리 이적을 추진했는데 외부에는 지나치게 낮은 몸값을 제시했다는 비난을 받아 서운하다”며 답답해했다.
지쎈 관계자도 “울산으로부터 정식으로 컨설팅을 의뢰받아 충실한 조언을 해주고 있지만 나쁘게만 비쳐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울산 구단도 이런 분위기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다.
울산의 한 프런트는 “선수 이적은 개인과 팀의 관계가 아니라 구단과 구단의 관계라는 측면이 더 크다”면서 “풀럼이 어이없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어떻게 피해만 보고 선수를 보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또 “선수 입장은 이해하지만, 우리도 원하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지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작년 여름과 지난 1월 비슷한 일을 겪었던 이천수다. 당시 포츠머스 및 위건과 완전 이적, 임대를 놓고 협상을 벌였으나 끝내 결렬됐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때도 에이전트가 난립, 혼선을 빚어온 게 아니냐는 질타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천수가 똑같은 아픔을 겪는 게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임대료-이적료 입장 팽팽
“내 연봉을 삭감해서라도 프리미어리그로 가고 싶다.”
이천수의 프리미어리그 진출 관련 첫 보도가 나왔던 지난 4월14일 풀럼측에서 울산 구단에 제시한 조건은 ‘6개월 임대후 완전 이적’을 전제로 한, 연봉 130만 파운드(약 23억4000만원)에 임대료 10만 파운드(약 1억8000만원).
풀럼측 의사를 전달받은 이천수는 “손해를 감수해도 반드시 영국에 가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울산은 임대료가 터무니없이 낮다고 판단, 설기현(레딩FC)과 이영표(토튼햄 핫스퍼)가 소속된 지쎈을 4월26일 구단 대리인으로 임명해 새로운 수정안을 작성했다.
이 안건에는 임대료를 올리고, 완전 이적시 이적료를 120만 파운드(약 21억6000만원)으로 확정한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IFA도 여기에 동의했다.
하지만 수정 공문을 보낸 지 3주가량 지났지만 풀럼은 묵묵부답이다.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풀럼에서는 이적 여부가 가려지기도 전에 이적료를 확정짓는 것이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선수가 어떤 활약을 보일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 풀럼이 보낸 최초 문건에는 ‘완전 이적시 200만 파운드 이내로 이적료를 책정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한편 풀럼이 계약한 LG전자 스폰서십도 묘한 기류를 자아낸다. LG전자는 최근 풀럼과 3년 계약을 체결하며 ‘한국 선수를 보유한다’는 조항을 포함했다. 이집트 출신 백화점 갑부인 알 파예드 풀럼 구단주와 좋은 관계를 맺어 북아프리카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하려는 마케팅 측면이라는 시각이 강하다.
이천수는 “스폰서십이 이뤄지기 전부터 풀럼행을 추진했다”고 말했으나 설기현이 새로운 팀을 물색한다는 내용과 LG와 사돈 관계인 GS그룹을 모기업으로 둔 FC서울 박주영이 해외 진출을 타진한다는 소식이 보도되며 새로운 흐름이 형성됐다.
더구나 설기현의 경우, 공식 에이전트가 지쎈이기 때문에 보는 관점에 따라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지난 4월26일 기자 간담회를 통해 김동국 사장이 언급한 “LG전자에 몇몇 선수를 추천했다”는 발언도 여운을 남긴다.
이천수 입장에서는 추천받은 선수가 누구든지 경쟁자가 한명이라도 늘어났다는 사실이 달가울리 없다.
◆현지 에이전시 창구는?
복잡한 에이전트 관계, 지지부진한 협상과 함께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된다.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풀럼이 고용한 에이전트는 지난 1월 이천수의 위건 이적건을 담당했던 ASI(Athole Still International)이다. ASI는 영국인 저명 FIFA 에이전트 아솔 스틸이 운영하는 저명 에이전시로 에릭손 전 영국 대표팀 감독, 산체스 풀럼 감독 등 굵직한 인사들이 주 고객이다. IFA는 풀럼의 부탁에 따라 ASI와 창구를 열었다.
그러나 ASI에서 고용한 한국인의 정체가 아리송하다. ASI를 통해 풀럼 입장을 국내 에이전시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이 베일속의 인물은 박미원 변호사. 영국 현지에서 활동하며 ASI의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지만 정작 국내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박 변호사가 IFA측에 풀럼이 이천수 영입을 원한다는 얘기를 흘려준 사실만이 소문을 통해 간접 전해질 뿐이다.
실제로 IFA나 지쎈은 물론, 울산에서조차 박 변호사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식자격을 인증받은 변호사가 아니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여러 루트를 통해 흘러나왔지만 “파트너인 만큼 믿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입장을 고집한다.
IFA 관계자는 “박 변호사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중계인 자격인지, 아니면 단순한 통역 역할인지 모르겠다”며 솔직히 사실을 시인했다.
지쎈 역시 모르는 게 당연지사. 지쎈 관계자는 “IFA와 관계하고 있어 뭐라 언급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대답을 피했다.
울산 관계자조차 “좋지 않은 얘기가 있는 것은 안다”면서도 “법률가라니까 믿고 맡기는 것이다”라는 답답한 대답을 반복했다.
사실 박 변호사의 실체가 어떻든 선수 이적건만 잘 풀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적이 불발될 경우, 책임 소재를 가리기 위한 법적 공방이 벌어질 수도 있다.
ASI와 국내 에이전시 사이에서 양측 입장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현상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이천수의 프리미어리그 진출은 이렇듯 어렵게 진행되고 있다.
#이천수, “이겼어도 눈물이 난다”
소속팀 울산이 5월23일 울산 문수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컵 대회 최종전에서 제주를 1-0으로 꺾고, 4강 플레이오프에 직행했지만 이천수의 표정은 어두웠다. 상대 수비수와 볼 경합 도중 이마를 긁히며 상처가 났기 때문. 공식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거부할 정도로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풀럼 이적설이 본격화된 5월부터 최근 4경기에서 4골-1도움을 기록하는 등 기세를 올리던 이천수는 상처 탓인지 이날 공격 포인트를 추가하지 못했다.
경기전 “좋은 모습을 보여 프리미어리그에 나가고 싶다”고 말하던 밝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90분만에 “카메라 치워요”라며 고개를 돌리는 속 좁은 예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차곡차곡 포인트를 쌓고, 프리미어리그로 진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날 경기에서 이천수는 ‘자기 컨트롤’이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잊고 있는 듯 보였다.
울산=남장현 yoshike3@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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