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매체마다 다르던데. 이름부터 통일해주세요. 유중탁은 왠지 정이 안가서….” 올해 4월부터 한국 남자배구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류중탁 감독(47)은 만나자마자 언론에 성(姓)부터 통일시켜 달라는 요청부터 한다. 자신은 ‘유중탁’이 아닌 ‘류중탁’이라며…. 큰 키(188cm)에 어울리지 않는 류 감독의 조용한 말투와 행동을 보면 코트에서 펄쩍거리며 선수들을 독려하던 사람이라고 믿기 어렵다. 그저 인상좋은 중년 신사였을 뿐이었다. 브라질과 핀란드 월드리그 원정전을 마치고 돌아온지 불과 하루만인 6월18일, 핀란드와 경남 양산 홈 2연전을 준비하던 류 감독을 서울 잠실의 한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대표팀 성적 배구 중흥 좌우
“우선 대표팀 성적이 좋아야 관심도 살아나는 거예요. 글쎄, 제 입장만 그런가요?”
독특한 시각이었다. 류중탁 감독은 최근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배구를 보다 어필하기 위해 대표팀 성적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감독은 지난 06·07 국내 프로배구 V리그가 팬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국제 대회에서 대표팀이 원하는 성과를 올려야 더 강한 임팩트를 줄 수 있다고 했다.
사실 배구에서 대표선수 차출을 놓고 협회와 구단이 갈등을 빚는 모습은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구단에서 먼저 대표선수들을 챙길 정도다. 베어벡 감독과 K리그 구단들이 매번 ‘공허한 싸움’을 벌이는 축구계의 모습과는 완전 딴 판이다.
류 감독은 그 원인으로 ‘동업자 정신’을 꼽았다. 배구가 축구처럼 폭이 넓지 않고, 규모가 작다보니 서로가 각자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이나 김호철 현대캐피탈 감독과는 어릴 적부터 호형호제한 사이다보니 어지간하면 대표선수들을 내준다. 대표팀 차출과 훈련이 원활히 진행되는 것은 물론이다.
류 감독은 대표팀 운영 전권을 쥐고 있는 전임 사령탑이다. 국내 배구 사상 최초의 전임 감독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손사레를 치며 펄쩍 뛰었지만 그 필요성은 인정했다.
지금까지는 프로팀 감독들이 대표팀까지 겸임해 신뢰도가 조금 떨어졌던 게 사실. 대표팀 감독이 맡은 프로팀이 아닌 다른 팀에서 뽑힌 선수들은 자신이 못뛸 경우, ‘감독이 나를 일부러 배제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하기도 했다. 하나 전임 감독 체제에서는 최소 투명성이나 공정성에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은 낮다.
“선수 입장도 이해합니다. 프로 감독이 대표팀에 오면 사사로운 정(情)에 이끌릴 수 있으니까요. 좋은 성적을 위해선 능력도 중요하지만 신뢰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어요.”
화제를 슬그머니 월드리그로 돌렸다. 브라질, 핀란드, 캐나다와 한조를 이룬 한국은 8경기를 치러 2승6패로 부진하다. 핀란드 홈 2연전과 캐나다 원정 2연전만이 남아있긴 하지만 모두 승리해도 결선 진출은 어려워진 상태.
베이징올림픽 티켓 문제없다
그러나 류중탁 감독은 이번 월드리그 성적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최근 은퇴한 신진식이나 김세진을 대체할 초대형 거포들이 없는데다 4개월에 이르는 V리그 장기 레이스를 소화하느라 주력 대부분이 파김치가 됐다. 어깨, 팔꿈치, 허리 등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선수들이 상당수였다. 컨디션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대회 일주일 전에야 소집해 손발을 맞춰보고 곧바로 월드리그에 나섰으니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체력이 가장 문제였다. 코트에 나설 수 없을만큼 큰 부상을 당한 선수들은 없었지만 세계 최강 브라질이나 높이에서 강한 핀란드는 버거웠다. 승기를 잡았어도 세트가 지날수록 체력저하가 뚜렷했다. 여기에 경험적 차이도 컸다. 패기와 젊음은 경험을 극복하지 못했다.
물론 얻은 것도 있었다. 문성민과 김요한 등 새로운 거포가 출연했고, 이경수가 주장의 역할을 잘 해냈다. 대표팀에는 각 팀들의 에이스만 모여있어 공격에 편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눈에 잘 띄지않는 디펜스에도 잘 가담한다며 류 감독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려한 플레이만 하던 선수들은 처음 대표팀에 오면 어색해해요. 임무를 몰라요. 그런데 문성민, 김요한, 이경수는 정말 성실해요. 전혀 몸을 아끼지 않아요. 고맙죠.”
류 감독은 세대교체 진행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비교적 만족스런 수준이라고 했다. 시간이 필요하니 조급해할 필요가 전혀 없단다.
“세대교체는 어느 순간 일어나지 않아요. 우리 목표는 08 베이징올림픽 메달이죠. 이번 대회를 통해 드러난 단점들을 차분히 보강하고, 바꿔야죠. 잘 되고 있어요.”
V리그 프로팀 한 팀만 더!
류 감독은 월드리그가 끝나면 지친 선수들에게 약 한달간의 휴가를 줄 계획이다. 이후 08 베이징올림픽 예선을 겸해 인도네시아에서 열릴 아시아 선수권(9월)을 준비하겠다는 것. 자동 출전국 중국을 제외하면 일본이 가장 두렵다. 류 감독은 선수들이 쉴 동안 일본 분석에 돌입할 생각이다. 어지간한 국가들은 모두 보유한 전력 분석관이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2개는 바라지 않아요. 더도말고 올해안으로 꼭 한팀만 더 창단됐으면 합니다.”
류중탁 감독은 대표팀 사령탑 이전에 배구인이다. 당연히 근래 최대 이슈가 되고 있는 프로팀 창단 문제를 모를 리 없다. 여느 배구인들처럼 류 감독도 프로팀 창단을 애타게 기다린다. 인기몰이는 대표팀이 하더라도 선수들의 실력과 경기력 향상은 프로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굳게 믿는다.
불행히도 총 6개팀으로 운영되는 국내 남자부 V리그의 상황은 참담하다. 삼성화재, 현대캐피탈, LIG, 대한항공만이 정식 프로팀으로 인정받을 뿐, 한국전력과 상무는 세미 형식으로 리그에 참가하는 수준이다. 8팀 이상을 보유해야 정식 리그로 인정받는데 현실은 암울하다.
그럼에도 06·07시즌 리그는 최고의 인기속에 막을 내렸고, 이에 고무된 KOVO(배구연맹)는 협회 등 배구인들의 지지속에 한전의 준 프로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이 달랐다. KOVO는 이사회를 통해 ‘한전의 준 프로화를 추진하자’는 내용이 나왔다고 주장했지만 한전은 ‘실무진으로부터 들은 바 없다’며 부인했기 때문. 공공기관 프로팀 운영이 불가하다는 법적 조항도 한몫했다. 결국 한전의 프로 전환이 백지화 위기에 놓인 가운데 배구팀 창단에 관심을 보인 몇몇 기업마저 발을 뺐다.
늘 한전 사태를 지켜봤다는 류 감독은 “한바탕 상승세를 탔을 때 강하게 추진했어야 하는데 올해는 또다시 어려워지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출했다.
사실 류 감독이 이처럼 답답해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프로팀 실력향상=대표팀 전력강화’란 공식탓이다. 배구에 대한 관심은 대표팀이 끌어와도 결국 대표 선수들의 실력을 높이는 것은 프로팀이기 때문. 또 선수들에 대한 복지 문제도 컸다. 팀이 적어 계약금과 연봉도 타 프로 종목에 비해 형편없다. 조로(早老)현상이 심해 선수 생명이 짧아 30대 초반이면 실업자 대열에 합류하는 현실은 무섭기까지 하다. 그 나이에 사업 등 다른 분야로 도전한다는 게 쉽지 않다.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배구는 좀 초라해요. 연봉이나 처우도 안좋고 선수 생명도 짧으니 돈도 많이 못벌어요. 차라리 안정을 찾으려면 한전이 낫다는 얘기도 있어요. 참, 암담하네요.”
즐거운 한편 우울하기도 했던 류중탁 감독과의 한시간 데이트였다.
남장현 yoshike3@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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