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전(前)’이란 말에 익숙해요. 과거를 잊지 못해서일까요?”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김기훈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40)와 직접 대화를 나눠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 김 전코치와의 첫 대면은 수년전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우연히 이뤄졌다. 당시 대표팀 훈련을 마치고 링크를 걸어나오던 그는 학창시절 운동삼아 스케이트를 배우던 기자의 모습을 보곤 “폼이 틀렸어. 이렇게 해봐”라며 동작을 세세히 알려준 뒤 어깨를 ‘툭’치고 지나갔다. 5분이라는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와의 첫 만남은 무척 강렬했다. 그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이젠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마주하게 됐다. 그러나 어색함은 없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편안했고 내내 즐거웠다. 테가 날카로운 안경과 따스한 미소가 묘한 조화를 이뤘던 김 전코치를 지난 7월24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작은 커피 전문점에서 만났다.
◆ 편애 없애야 산다
“한국 쇼트트랙은 어디에서도 승리합니다. 예전에도 최고였고, 지금도 그래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두말할 나위없이 한국 쇼트트랙은 수십년째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중국 미국 캐나다 등 수많은 강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지만 한국은 얄미우리만치 굳건히 위상을 지켜내고 있다.
스포츠 평론가들은 이 자랑스런 전통과 영광이 김기훈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를 비롯, 이준호 전 쇼트트랙 여자대표팀 코치와 전이경 IOC 선수위원 등 이른바 ‘제1세대’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성적을 올린 김 전코치. 그는 88 캘거리 동계올림픽, 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등 수많은 국제대회를 제패하며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줬다. 일단 물꼬를 트자 ‘영예의 대(代)’는 꾸준히 이어졌다. 김 전코치 이후 채지훈, 김동성, 안현수 등이 배출돼 감동의 릴레이는 계속될 수 있었다.
“저희들이 다진 발판을 딛고, 후배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합니다. 이 맛에 내가 스케이트를 신었구나하는 보람도 있고, 자랑스러워요.”
하지만 가슴 한켠을 후리는 듯 느껴지는 아픔. 자신의 영광속에 잊혀진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김 전코치는 “내가 있어서 쇼트트랙이 발전한 게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했기에 내가 설 수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쇼트트랙은 타 종목에 비해 잔인한 종목으로 묘사되곤 한다. 어떤 선수를 하나뿐인 1위로 만들기 위해 다른 선수들을 ‘보조’역할로 빼는 전술운용 때문이다.
이는 오래전부터 특정 관행처럼 유지됐고, 결국 수많은 선수들이 조용히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화려함만이 가득했을 법한 김 전코치도 현역 시절, 누군가에게 배척을 당하는 등 말못할 아픔을 겪은 바 있어 이들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는 02년 7월 대표팀 코치로 선임된 이후 이런 폐단을 없애고, 모두에게 고른 기회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고안했으나 몇몇 파문에 휘말려 환경을 바꿔보지 못하고 아쉬움속에 물러나야 했다.
“한 선수에게 영광을 주기 위해 나머지를 희생해야 하는 사고방식은 이제 버려야해요. 시상대에서 침울한 표정의 2~3위 선수들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코치 시절, 바로 이 점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부터 환경을 바꿔보려 했는데 그만 뜻대로 되지 않았네요.”
◆ 스케이트 강매와 선수단 입촌거부 파문
이즈음에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김기훈 전코치가 대표팀 지휘봉을 놓게 된 진짜 배경을 말이다. 혹여 상처입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김 전코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 잊었는데요. 괜찮습니다”라며 선뜻 입을 열었다.
전명규 한체대 교수에 이어 02년 7월 쇼트트랙 대표팀 남자부 사령탑으로 선임된 김 전코치는 04년 세계선수권 대회를 모두 휩쓸어 스타 감독 탄생을 알렸지만 그해 10월 ‘스케이트화 강매’ 파문에 휘말려 코치직을 그만둬야 했다.
당시 김 전코치가 미국 전지훈련을 앞두고 부친(김무정)의 사업체에서 제작한 스케이트를 대표팀 선수들에게 강제로 신도록 했다는 게 이유였다.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김 전코치는 “이런 사태가 뻔한데 어떻게 선수들에게 (스케이트화를)강매할 수 있었겠냐”고 항변했지만 선수들의 자술서를 받은 연맹은 끝내 책임을 물었다.
결국 떼밀리듯 대표팀에서 물러난 김 전코치의 아픔은 1년만에 다시 반복됐다. 연맹은 대표팀을 이끌만한 마땅한 인물이 없자 토리노 동계올림픽을 10개월 앞둔 시점인 05년 4월 다시금 그를 불러야 했다. 그러나 이번엔 선수들이 반발했다. 안현수를 제외한 나머지 7명 선수들이 “특정 선수를 밀어주는 지도방식에 따를 수 없다”며 입촌을 거부한 것. 결국 김 전코치는 재선임 2주만에 대표팀에서 다시 나오고 말았다.
“정말로 서운했죠. 코치로 부임하며 ‘모든 선수를 동등하게 대우하자’는 원칙을 세웠는데 오히려 정 반대의 결과가 나왔으니…. 안현수를 특별히 챙겨주진 않았어요. 노하우나 기술을 더 전수한 것도 아니고요. 또 문제가 된 스케이트 강매도 오해예요. 선수들 본인이 원해서 신게 했을 뿐, 종용한 적은 없습니다. 각자 자신에 맞는 스케이트가 있는데 어떻게 그걸 강제로 바꾸게 합니까?”
어려운 질문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소신껏 답한 김 전코치는 오히려 일련의 사태들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며 자신의 근황도 밝혔다.
“최근까지 대학원(한체대)에서 스포츠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대표팀에 머물렀다면 학업도 계속 중단됐겠죠. 얼마전 박사 학위도 받았고, 작년 10월까지는 목동 아이스링크를 오가며 초중고 주니어 선수들을 가르쳤습니다. 작년 세계 주니어 대회에서 우승한 최정원도 지도해봤습니다. 대표팀만큼이나 보람있는 경험이었어요.”
◆ 이명박 지지? 정치색 결코 없어
화제를 최근 매스컴을 통해 이슈가 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로 돌렸다.
김기훈 전코치는 유남규 탁구 국가대표팀 감독, 박광덕 전 씨름 백두장사 등 전·현직 스포츠 스타 70여명과 함께 지난 7월20일 서울 여의도 이명박 후보 대선 캠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해 화제를 모았다.
혹여 정치에도 뜻이 있어서가 아니냐 잔뜩 기대를 하며 질문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김 전코치의 대답은 영 미지근했다. 그는 한나라당 후보로 지난 2차례 대선에 나간 바 있는 이회창씨의 캠프에 체육특보로 발탁돼 활동한 것이 인연이 돼 올해에도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뿐이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이회창 후보 때부터 쭉 한나라당을 지지해 왔고, 이번에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겁니다. 다만, 지금 경제가 많이 죽었잖아요. 또 체육부가 문화관광부에 속해있어 제 위상을 못찾고 있고요. 스포츠인의 한 사람으로서 아쉬웠죠. 또 경제가 살아야 스포츠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살아날 수 있
다고 생각해 이명박씨를 지지하게 됐습니다.”
결국 정치권에도 생각이 없다? 그럼, 김 전코치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걸까. 지금껏 조곤조곤하던 말투는 어느새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앞으로 공부는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10여년의 국가대표 선수 생활과 짧지만 나름의 성과를 올렸던 2년여의 지도자 경험을 토대로 한 스포츠 이론과 실제를 접목시켜보고 싶어요. 어렵게 배운 학문들을 썩히면 억울하잖아요.”
그렇다고 현역 지도자로 돌아가고픈 생각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고 되돌아갈 계획이다. 물고기가 본향인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자신의 성장배경이 됐던 빙판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얼음판은 제 고향입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 언제가 될지 장담하기 어렵지만 전 최선을 다할겁니다. 다시 한번 불러줄 때, 멋지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준비도 철저히 할 생각입니다. 가족들도 빙상인 김기훈을 바라요. 기대해주세요.”
남장현 ypshike3@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