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역습’ 없다” 검찰 칼끝 정조준 내막

법조 삼륜(三輪)의 두 축이 휘청거리고 있다. ‘용산참사’ 수사기록 공개와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무죄 판결로 골이 깊어진 법원과 검찰이 PD수첩 광우병 보도 무죄 선고에 전면전을 벌일 태세다. 여기에 여야가 각각 검찰과 법원을 옹호하고 맞서 새해벽두 대한민국은 ‘新 이념전쟁’에 휘말린 모양새다. 특히 보수진영은 일련의 판결을 내린 3명의 법관을 향해 집중포화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고 있다. 일부는 특정 법관의 자택까지 찾아가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해당 판사에 대한 법원의 신변보호 결정이 내려지는 등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보수진영으로부터는 ‘민족의 반역자’라는 폄훼를, 진보진영에서는 ‘사법부의 양심’이라 치켜세워지고 있는 해당 판사들은 극도로 말을 아끼며 외부 노출을 자제하고 있다. 이른바 ‘진보의 역습’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번 ‘튀는 판결’의 쟁점과 이 같은 판결을 내린 이광범, 이동연, 문성관 판사의 면면을 <일요서울>이 들여다봤다.
법원 과 검찰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13일 서울고등법원이 ‘용산참사’와 관련 검찰의 미공개 수사기록 2000여쪽을 변호인에게 공개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면서부터다. 검찰은 법원이 형사소송법을 위반했다며 곧바로 대법원에 상고하고 재판부에 대한 기피신청을 냈다.
그러나 이 같은 검찰의 반발을 비웃기라도 하듯 용산참사 관련 선고가 있은 지 바로 다음날인 지난 14일 법원은 국회 내 폭력 혐의로 기소된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여기에 지난 20일 광우병 관련 허위 보도 논란으로 법정에 섰던 PD수첩 제작진 역시 죄가 없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오자 검찰은 충격에 빠졌다. 용산참사 기록공개와 강 대표 무죄 판결로 유례없이 강하게 반발했던 검찰은 PD수첩 무죄 결정을 계기로 실력행사에 나설 전망이다.
여기에 검찰의 입장을 지지하는 보수단체·언론과 법원 측을 옹호하는 진보단체·언론이 대리전에 뛰어들었다. 또 대한변호사협회(이하 변협)와 여당 의원들이 사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법·검 대립은 사회적 갈등으로 비화되기 직전이다.
이광범 판사 ‘진보법관 1세대’
용산참사 관련 검찰 수사기록 공개를 결정한 이광범 부장판사(서울고등법원 형사7부·사법연수원 13기)는 진보법관 1세대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박시환 대법관 등과 함께 진보 성향 판사 모임 ‘우리법연구회’ 창립 멤버였던 이 부장판사는 지난 2005년 2월 우리법연구회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고등법원 부장판사직에 올랐다.
이 부장판사는 우리법연구회를 오래 전 탈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참여정부 시절 법원 내 요직을 거치는 바람에 ‘진보’ ‘좌파성향’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참여정부가 이용훈 대법원장을 임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대법원장 취임 직후 대법원장 비서실장직에 올랐다.
이후 법원행정처 인사실장, 사법정책실장 등 주요 보직을 거친 이 부장판사는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초 사법 개혁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 2월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부임한 뒤 민사14부 부장판사를 지냈다.
이 부장판사가 형사7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지난해 2월로 용산참사 사건 2심을 맡아 재판을 진행했다. 그는 지난 6일 비공개로 열린 첫 공판에서 수사기록을 공개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논란의 불을 지피기도 했다.
이 부장판사는 지난 15일 법원에서 만난 취재진의 질문공세에 “판사는 판결로만 이야기한다”며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
이동연 판사 ‘까다로운 원칙주의자’
국회 내 폭력 혐의로 기소된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동연 판사(서울남부지법·사법연수원 26기)는 이 사건으로 보수진영의 대표적인 표적이 됐다. ‘우리법연구회’ 소속도 아닌 이 판사가 ‘좌파 법관’의 대표격으로 몰매를 맞고 있는 것이다.
판결에 불만을 품은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이 판사의 자택 앞에서 집회를 열고 농성을 벌이는 등 그를 향한 보수진영의 적대감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서울남부지방법원은 지난 20일 이 판사에 대한 신변보호를 결정하고 경찰에 협조를 구하기까지 했다.
이 판사는 수사기관 공무집행의 정당성에 대해 상당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12월 민주노총 조합원 김모(36)씨에 대해 청구된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을 꼽을 수 있다.
김씨는 서울 영등포2가 민주노총 건물 앞에서 철도노조 집행부를 검거하기 위해 검문 중이던 박모 순경(31)을 차량으로 들이받은 혐의(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를 받았었다. 그러나 이 판사는 김씨에 대해 증거 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이 판사는 특히 “불심검문 자체가 정당한 공무집행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논란을 일으켰다.
불심검문은 범죄 혐의자를 대상으로 해야 하는데 김씨는 철도노조와 아무 관계가 없었고 검문 장소도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길이므로 적법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당시 남부지법은 공보판사를 통해 “심문 결과 동승자를 내려주려고 서행하고 있어 고의가 없던 것으로 판단됐고 차량이 박 순경을 스쳐 지나간 정도여서 거의 다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판사는 이달 초에도 ‘튀는 판결’을 했다. 은행 대출을 알선해준 대가로 금품을 받고 구속 기소된 산업은행 전 직원 김모(43)씨에 대해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면소 판결한 것. 검찰이 “해외 체류 기간은 공소시효에서 빼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판사는 “처벌을 면할 목적으로 해외에 머문 것이 아니다”고 판단했다.
이런 성향 때문에 이 판사는 법조계에서 국가기관의 법 집행에 상당한 엄격함을 요구하는 법관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1997년 법관으로 임용된 이 판사는 임용 이후 대전·충남 지역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2월 서울남부지법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보 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엔 소속돼 있지 않다.
‘보수 판사의 변신?’ 문성관 판사
이념논란에 휘말린 법관 3인방 가운데 PD수첩 광우병 보도 무죄 판결을 내린 문성관 판사(성울중앙지법 형사13단독·사법연수원 29기)는 ‘의외의 인물’로 꼽힌다. 올해 40세로 임관 10년차를 맞은 문 판사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합리적이고 무난한 성향의 법관’이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6월, 형사13단독 문성관 판사에게 이번 사건을 배당했다. 법원은 부장판사와 배석판사 등 3명으로 구성된 합의부로 넘기는 ‘재정합의’를 하는 방안도 고려했지만 민감한 사건을 놓고 재판부를 조정하는 것은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자동 배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보수 법관에게 동원되는 수식어가 한결 같이 따라 붙었던 문 판사는 우리법연구회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 대법원 관계자는 “문 판사가 임관 이후 지금까지 5613건의 판결을 내렸지만 대법원 판례를 뒤집는 경우는 없었다”며 “합리적이고 무난한 성향을 가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문 판사가 세간의 관심을 끈 대표적인 사건은 지난해 6월 평양 민족통일대축전에 남측 대표단으로 참가한 통일연대 이천재(79) 상임대표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것이다. 당시 이 대표는 국가보안법 위반(찬양·고무 등) 혐의로 기소됐었다.
이 대표는 2001년 “북한의 통일노선 상징물인 3대헌장탑에 가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뒤 조건부로 방북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15일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에 참석해 북한 당국자의 연설에 박수를 치는 등의 행위를 한 것이 적발돼 기소됐다.
문 판사는 당시 선고에서 “조국통일 3대 헌장을 상징하는 조형물 앞에서 열린 집회인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 행사에 피고인이 참석하고 그 자리에서 북한 당국자의 연설에 박수를 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만으로는 반국가단체 등의 활동에 호응·가세한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외부에 표시하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문제의 행사가 남북이 공동으로 주관한 대규모 행사였던 만큼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 고무할 목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는 취지였다.
문 판사는 재판 결과에 따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예상되는 이번 PD수첩 선고 공판을 앞두고 상당한 준비와 고심을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법리를 수없이 반복해 검토하고, 80여쪽 분량의 판결문을 작성하면서도 문구 하나하나에 각별히 신경 썼다는 것.
동료 판사는 “국민과 법조계의 이목이 ‘PD 수첩 재판’으로 쏠린 만큼 며칠간 고민을 거듭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문 판사 본인도 선고를 앞두고 “방대한 기록 검토가 힘들었다. 후련하다”며 그간의 마음고생을 토로하기도 했다.
제주 출신의 문 판사는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 수료와 동시에 광주지법에 부임해 법관생활을 시작했다. 수원지법 안산지원, 서울 동부지법을 거쳐 지난 2008년 2월부터 서울 중앙지법에 재직 중이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우리법연구회’는 어떤 단체?
최근 보수진영으로부터 ‘좌편향적 법관들의 사조직’으로 지목된 ‘우리법연구회’는 법원 내 진보성향 판사들의 연구모임이다. 현재 문형배 부산지법 부장 판사가 ‘우리법연구회’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회원수는 140여명이다.
‘우리법연구회’는 1988년 6·29 선언 뒤 제5공화국 당시의 사법부 수뇌부가 유임된 것을 계기로 발생한 ‘2차 사법파동’ 당시 진보 성향 판사들이 모여 창립했다. 당시 창립회원으로는 김종훈, 강금실, 강신섭(현 변호사·법무법인 세종), 오진환(현 변호사·세계종합 법무법인), 유남석(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박윤창(현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 이광범(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등 판사 7명과 박종술(법무법인 북부합동법률사무소), 이태화, 이양원(법무법인 부천종합법률사무소) 등 변호사 3명 등 모두 10명이다.
최근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에 무죄를 선고한 이광범 부장판사는 오래 전 조직을 탈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용산참사 기록공개와 PD수첩 제작진 무죄를 선고한 이동연, 문성관 판사는 ‘우리법연구회’와는 무관한 인물들이다.
참여정부 시절 ‘우리법연구회’ 출신인 박시환 대법관,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김종훈 전 대법원장 비서실장 등이 정부 요직에 잇달아 발탁되자 일각에서는 ‘우리법연구회’가 판사들의 정치적 사조직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또 2008년 촛불 집회 관련 재판 배당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이정렬(사시 33회) 서울동부지법 판사와 송승용 (사시39회) 울산지법 판사도 ‘우리법연구회’ 소속이다.
최근 일련의 판결로 보수·진보진영의 갈등이 깊어진 가운데 여당이 우리법연구회 해체를 공식 요청하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이에 이용훈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독립을 지킬 것”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 귀추가 주목된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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