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1929년 대공황 그때 그 현실과 한국
미국의 1929년 대공황 그때 그 현실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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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8-09-26 15:58
  • 승인 2008.09.26 15:58
  • 호수 752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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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금융시장을 지배하던 미국의 초대형 투자 은행인 리만브러더스, 메릴린치, AIG 등이 파산 직전으로 내몰렸다. 이미 베어스턴스, 페니메이, 프레디맥 등은 연방정부의 공적자금 투입으로 겨우 연명해 가고 있는 상태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대출) 부실사태로 빚어진 연쇄반응 이다.

9월15일 미국 뉴욕 월 스트리트 증권시장의 다우존스산업 평균 지수는 4.48% 폭락하였다. 영국 3.92%, 브라질 7.59%, 러시아 4.78%, 한국 코스피 지수 6.10%로 각기 곤두박질 쳤다. 17일에도 다우 지수는 4.06% 더 내려갔다. 세계가 심리적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미국 월스트리트 발 금융 위기를 지켜보면서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이 또 다시 불어닥치는게 아니냐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18일 “정부의 특별한 조치에 시장이 적응해 가고 있다”고 안심시켰다.

만약 1929년의 대공황이 재현된다면, 세계는 총체적 파산을 면할 수 없다. 당시 대공황의 여파가 얼마나 끔찍했는가를 재조명 해보며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1929년 10월23일 미국 증권시장에서 철도와 산업주가들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1주일만에 평균지수가 무려 37%나 급락하였다. 그 후에도 주가는 계속 내려가더니 1932년 7월1일 5분의1로 줄어들었다.

많은 은행들이 파산하였고, 평생 아껴모은 재산은 은행 파산과 함께 날아갔다. 실직율은 25%에 달하였다. 대공황은 전 세계 경제를 부도로 몰고갔다.

풍요롭던 미국의 길거리는 주택을 차압당해 쫓겨난 노숙자들과 실직자들로 웅성댔다. 당시 시카고의 한 신문 보도에 의하면, 굶주린 시민들은 식당 쓰레기통을 뒤져 연명해 갔다. 식당 뒷문쪽에는 20-30여명씩 떼지어 기다렸다. 그들은 쓰레기 통이 나오면 나뭇대기로 통을 휘져어 먹다남은 고깃덩이와 채소를 건져냈다. 그들은 서로 쓰레기를 더 차지하려 몸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칼바람이 부는 한 겨울에도 텐트 속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이 적지않았다. 어린이들은 바지도 입지못한채 양말도 없이 배고픔 속에 덜덜 떨었다. 어느 도시에서는 굶주리다 못한 시민들이 식품상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돌이켜 보면 저토록 고통스럽던 대공황도 인간의 불안심리 탓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 교수는 1954년 출판한 저서 ‘대 파산’(The Great Crash 1929)을 통해 미국인들의 불안과 공포 심리가 대공황을 촉발시켰다고 분석하였다.

그는 미국인들이 1929년 10월 23일의 주가 폭락에 당황하지 않고 냉철히 대응했더라면, 그 무서운 대공황은 피해갈 수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불안심리속에 너도 나도 주식 처분에 나서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돼 미국 경제를 망쳤다고 하였다.

갈브레이스의 해석에 많은 전문가들이 공감한다. 80년전의 대공황 교훈을 되새기며 오늘의 월 스트리트 쇼크에도 당황치 말고 차분이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찰스 달라라 국제금유연합회 회장은 17일 한국 경제계가 “지나치게 겁을 집어먹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한국의 수출 증가율은 20%대에 이르고, 외환보유고도 2000억달러가 넘는다.”며 겁먹을 필요없다고 낙관하였다.

1929년 10월을 교훈 삼아 냉철히 대처한다면, 2008년 9월의 충격도 한 동안 출렁이겠지만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80년전 대공황 역사가 남긴 값진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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