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국회 의사당 앞거리는 철야농성중이다. 도로 양편에는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의 천막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다. 며칠 지나다보면 또 하나가 늘더니 이제는 천막촌을 이루었다. 그곳에는 저마다 다급하거나 애절한 주장을 담은 울긋불긋한 걸게나 깃발을 내걸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가로수에는 갖가지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나 패널이 걸려있다. 때로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이 엄동설한에 그들은 노숙, 단식하며 국회를 향해 절규하고 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말이다.그들이 아스팔트로 나선 이유는 각색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 언론개혁 3대법 제·개정, 과거사청산법 개정, 비정규직 차별철폐, 장애인 이동권과 교육권 확보, 쌀시장 개방반대, 의료시장 개방반대, 민주노동당 시국농성 등등…이다. 그곳에 가보면 한국사회가 얼마나 많은 모순을 지니고 있는지 알만하다. 그들은 그것을 풀기 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해달라는 소리를 몸으로 전하려고 그곳에 모였다. 국회는 민의의 전당이라고 말한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뜻을 호소하려고 농성장을 차렸다. 보도블록을 베개 삼고 자동차 굉음을 자장가 삼아 냉기 서린 길바닥에서 새우잠을 잔지도 길게는 두 달이 넘는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노상기자회견이나 집회가 열린다. 때로는 국회를 향해 메아리 없는 함성을 울리기도 한다. 전경들과 심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지금 수백명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며 단식중이다. 그들은 자리가 모자라 여의도 공원에도 천막촌을 차렸다. 하지만 국회는 눈도 감고 귀도 막고 모르는 척한다. 17대 국회는 63%가 초선의원이다. 이것은 수구세력의 퇴조와 혁신세력의 부상을 의미한다. 이 같은 정치지형은 국민의 선택이니 그 뜻에 따를 줄 알았다. 그런데 하고한 날 몸싸움, 입씨름으로 소일하고 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어떤 국정현안도 파당적 시각에서 판단한다. 모든 사안을 이념의 잣대로 재서 국론을 분열시킨다. 그리고 갈등과 대립을 조장하여 국민을 양분시킴으로써 지지세력을 규합한다. 6월 항쟁은 미완의 장으로 끝났다. 그 나머지 장을 채우려면 사회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구시대의 적폐를 혁파해야 사회·정치·경제개혁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4대 개혁법안은 진정한 민주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밑그림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빨간색으로 착색하여 이념공세로 국민을 오도하고 있다. 동구권이 EU(유럽연합)와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고 있다. 중국이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나 내면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분단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작태인가?남의 나라에서는 반세기 전에 매카시즘이 소멸했다. 그런데 21세기 초엽 무이념의 시대에 이 나라의 국회는 그 망령에 사로잡혀 걸핏하면 굿판을 벌인다. 누구 누구가 빨갛다고 소리쳐서 난리를 피운다. 그것도 면책특권을 빌려 난장판을 만듦으로써 국회일정을 파행으로 몰고 간다. 군벌독재 시절에 많이 써먹던 그 낡은 수법이 아직도 통용된다. 안보논리는 군벌독재의 영속화를 위한 도구였다. 그런데 아직도 수구세력이 거기에 기대서 기득권을 향유하려고 몸부림치니 국회는 공전될 수밖에 없다. 17대 국회에서도 모든 정쟁의 불씨는 이념싸움에서 비롯된다. 거기서 밀리지 않으려니 어떤 사안을 놓고도 쌈질을 일삼는다. 법정개원일을 지키지 않고 상임위원장 자리를 놓고 국회를 공전시킨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배경에는 그것이 깔려있다. 예산심의가 법정시한은 물론이고 정기국회 회기를 넘긴 것도 그 짓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4대 개혁법안도 이념의 눈으로 보니까 타협을 모르는 것이다. 17대 개원이래 제출된 안건은 1,143건이다. 그 중에서 24.7%인 282건만이 처리됐다. 그 마나도 정기국회 회기를 이틀을 남기고 152건이 무더기로 처리돼서 그 정도라도 된다. 얼마나 많은 안건이 졸속심의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도 청원은 111건 중에 단2건만이 처리됐다. 국회 앞거리 농성장, 단식장에서 국민의 염원을 담은 절규가 쏟아지고 있다. 임시국회에서라도 그 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지 모르겠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