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5월31일 지방선거 직후인 6월로 연기한다는 게 여권과 동교동의 반응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도 ‘정치적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 그러나 방북을 연기하게 된 구체적인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DJ가 야당의 우려와 국민 여론을 수렴해 방북 시기를 연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의도 국회에서 여야 설전이 되풀이 됨에도 동교동은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방북과 관련 의지를 내보일 뿐, 그 시기와 관련해선 정치권의 판단에 맡긴 듯했다. 지난해 병상에서 털고 일어난 이후 DJ는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개방의 필요성과 자신의 역할론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을 뿐이다.
10월->4월->6월 ‘오리무중’
물론 여권도 DJ 방북과 관련 이미 오래 전부터 추진하고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여권 한 핵심인사에 의하면 여권 내부에선 DJ 방북과 관련 지난해부터 그 시기를 두고 고민을 해왔다. 물꼬를 튼 사람은 정동영 당의장이다.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할 무렵 지난해 6월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한 이후 동교동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DJ 방북 10월 추진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이어 지난 2000년 6·15 정상회담 당시 이면합의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김 위원장의 ‘답방’ 문제가 오고가면서 ‘열차 답방’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상 지난해 10월 방북추진은 설로 그치고 말았다는 것.
그리고 올해 불거진 DJ 방북의 단초는 노무현 대통령이 제공했다. 지난해 12월 동교동과의 전화통화에서 노 대통령은 “북한을 한번 다녀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방북을 제안했으며, 이에 DJ 역시 “북한을 방문할 계획이 서면 정부와 상의하겠다”고 화답했던 것. 그렇다면 이달 초까지만 하더라도 4월말에서 4월중순 방북이 유력하게 검토되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6월로 연기된 배경은 무엇인가. DJ는 지난 2월23일 4월로 추진하던 방북 계획을 6월로 연기한 데 대해 “국민이 원하는 것이 옳다”, “여론조사 등을 보니 지방선거 이후에 가라는 여론이 많아 연기했다”고 언급했다.
방북의지는 ‘결연’
하지만 그가 평생의 과업으로 여겼던 ‘햇볕정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는 방북이라는 중차대한 일정과 관련해 여론, 엄밀한 의미에서 야당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DJ의 의중’이었다는 결론으로 모아진다.4월말 방북이 흘러나오던 무렵, 동교동 소식에 정통한 한 인사는 “DJ의 방북 의지는 결연하다 하더라도 ‘시기’ 만큼은 여권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사실상, DJ 방북 카드가 지방선거와 맞물려 국면 전환책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모를 리 없다는 것.그는 이어 “동교동에선 올해 방북 일정과 관련 지방선거와 무관한 시기인 올해 2월, 또는 6·15 정상회담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의미에서 6월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에 의하면 갑작스럽게 불거진 4월 방북 추진은 동교동의 의지와 무관한 지방선거를 겨냥, 여권 핵심부가 막무가내로 추진한 인상이 짙다. 여권 내부에서 전해지는 DJ 방북 시기가 4월에서 4월말로 압축되고 있다는 것에도 그는 강한 의문점을 남겼다. 여권의 요구대로 지방선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기로 결정된다면, ‘가지 않겠다’는 DJ의 충격 발언도 감지된다는 것. 한편, 또 다른 인사는 방북을 둘러싼 여야의 공방전도 DJ에게 부담이라는 동교동 분위기를 전했다. 사실상 동교동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진 ‘4월말’ 계획도 부담인데다, 연일 언론을 통해 DJ 방북 관련 보도가 터져 나와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게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얘기다.
DJ 방북 후속타에 여야 흔들
애초 4월 방북설이 유력하게 검토되자, 야당은 지방선거를 겨냥한 정치공작, 광대놀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이에 여권은 DJ 방북 이후 ‘열차’에 싣고 올 ‘선물’에 대한 가상의 시나리오도 흘려보냈다. DJ가 열차를 타고 평양을 방문한다. 이후 끊어진 남북간 철길이 이어지듯,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 및 남북관계에도 서광이 비친다. 그리고 납북어부와 국군포로들을 기차에 태워 돌아온다는 등의 근거없는 핑크빛 전망. 그리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 논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 문제는 가상 시나리오의 완결판이다. 설전을 벌이고 있는 신경전에서도 여야 정치권의 속내는 감지된다. 오는 5월 지방선거에 미칠 파장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야당은 우리당이 흘려보내는 최상의 시나리오(2007 대선 전 남북정상회담)대로 DJ 방북의 후속타가 이어진다면, 어떠한 정권교체의 명분이라도 존재 가치를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가 드러나 보인다. 물론 여권도 같은 계산이다. DJ 방북 효과는 최소한 호남민심, 최대 참여정부를 출범시킨 전통 지지층을 회복하는 데 최고의 처방전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선 듯하다. 여당 일각에선 지난 2000년 6·15 공동선언 이전 지방선거 참패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치적 이용 가능성에 고개를 젓고 있으나, 참여정부가 역대정권 최악의 정권이라는 여론조사를 감안한다면 야당을 향한 여당의 ‘웬 북풍’이냐는 반박 논리도 궁색해 보인다. 이러한 여야 정치권의 설전이 진행되는 와중에, 지방선거 이후 방북 일정에 대한 동교동과 청와대의 신경전이 벌어졌다는 게 다수의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때문에 5월 지방선거 이후 6월이라는 절충안이 나왔다는 것. 결국 노무현 정권의 진퇴와 관련 ‘정치적 들러리’는 하지 않겠다는 DJ의 의지가 막후 협상을 이끌어냈다는 결론이다.
참여정부 실정도 ‘한몫’
그러나 여전히 의문점은 남는다. “DJ가 6월에 방북을 해도 5월말 지방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정세분석가 A씨의 주장이다. 그는 “오히려 여당은 무엇인지도 모를 ‘선물’에 대한 기대효과를 이용, 선거전을 유리한 구도로 이끌 수 있다”는 분석도 덧붙였다. 그는 이어 “참여정부 출범 초까지만 하더라도 ‘DJ 방북은 없다’며, 동교동 인사들이 분풀이하듯 말하고 다녔다”면서 “상황이 이렇게 반전된 데에는 참여정부의 실정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며 DJ의 심경 변화에 의혹을 제기했다. 지방선거, 통관문제, 북한의 초청이라는 일차적인 이유에 더해 뭔가 다른 복심(腹心)이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 결국 지방선거 직후 불어 닥칠 정계개편의 회오리와 DJ의 방북 이후 구상이 맞닿아 있다는 지적이다.
# ‘DJ 방북’ 놓고 한나라당 ‘내홍’
이제 막 시기를 결정, 첫 삽을 뜬 ‘DJ 방북’이 벌써부터 한나라당 안팎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노선투쟁이 그것. DJ 방북 지지파와 반대파간 노골적인 반감으로 시작한 노선투쟁은 2007년 대선과 관련, 당내 역학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당내, 겉으로 드러난 사건은 골수 보수로 분류되는 김용갑 의원과 소장개혁파 고진화 의원의 설전이다. 고 의원이 최근 몇몇 여야 의원들과 함께 DJ 방북 지지를 주장한 게 김 의원의 화를 불러왔다. 김 의원은 “고진화, 누가 좀 안 잡아가나”라는 글을 당 홈페이지에 올렸다.
또한 고 의원과 원희룡 의원이 한나라당적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진짜 이념적 좌파도 못되어 열린우리당에도 못 들어가는, 시류 영합형 정치적 좌파이기 때문”이라고 혹평했다. 이에 고 의원도 보도자료를 통해 김 의원을 ‘냉전의 쳇바퀴를 헛도는 다람쥐’로 비유했다.이와 관련, 원희룡 남경필 등 소장개혁파 주변에선 수구로 통하는 영남의원들과 거리두기에 들어갔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편, DJ 방북을 둘러싼 장외 논쟁도 활발하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지난 2월23일 권철현 출판기념회에 참석, 축사를 통해 “김 전대통령은 햇볕정책을 펴다 북한의 핵무장을 낳은 장본인”이라며 “북한의 핵 보유에 죄책감을 느끼고 몸을 던져 핵을 폐기시켜야 할 사람이 새로운 남북관계를 위해 방북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DJ 방북을 강력히 비판했다.
‘정계은퇴’를 선언, 정치 현안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꺼렸던 이 전총재였기에 ‘정계복귀’에 대한 해석도 등장했다. 게다가 얼마 전 만난 이 전총재의 측근은 “요즘 총재는 좌파정권 심판과 정권교체에 나름대로 역할을 찾고 있다”면서, “생각이 정리되면 지방선거 이후 본격적인 행보에 나설 것”이라고 전한 바 있다. 정치권 한 인사는 “정계복귀 포석으로 97년 대선의 맞수였던 ‘DJ’를 선택, 이념 발언으로 등장한 이 전총재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면서 “한나라당 내부의 노선투쟁이 심화될수록 이 전총재의 정계복귀는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nicky@ilyoseoul.co.kr 이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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