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하늘엔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
1921년 하늘엔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
  • 공문룡 칼럼니스트
  • 입력 2004-11-15 09:00
  • 승인 2004.11.15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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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 "

1989년 11월 9일 저녁 7시. 동독 공산당(SED) 정치국원이자 선전 담당 비서인 귄터 샤보브스키의 긴급 기자회견을 방송을 통해 듣고있던 동독 국민들은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동독 국민들은 모든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은 ‘체크 포인트 찰리’를 비롯해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검문소로 밀물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밤 10시쯤 마침내 동베를린 시민들은 검문소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서쪽에서는 샴페인 폭죽이 이들을 맞았다. 환호와 눈물, 격렬한 포옹…. ‘베를린 장벽 붕괴’의 세기적 뉴스가 전 세계로 타전됐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이날 샤보브스키가 국경 개방의 시점을 ‘지금부터’라고 발표한 것은 ‘실수’였다. 1891년 11월 10일 "시인 아르튀르 랭보 별세"“랭보는 하나의 기적이었다. 서른 일곱 살에 순교자와도 같은 죽음. 이것은 인류 역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랭보의 비극적 인생이다”고 알리 마타라소는 자신의 저서 <랭보의 비극적인 생애>에 썼다.랭보는 16세부터 19세까지 2,500 행의 시를 쓰고, 세계 각지를 유람하다가 아프리카에서 병으로 한 쪽 다리를 절단한 채 쓸쓸히 죽었다.

1977년 11월 11일 "전북 이리역 구내서 화약열차 폭발"

다이너마이트 24톤을 싣고 인천을 떠난 지 36시간만에 이리역에 도착한 화물열차 폭발로 반경 1km 지역이 초토화되고 10km 안의 모든 창문 깨짐.책임자의 사소한 실수로 일어난 이 사고로 모두 59명이 죽고 1,316명의 부상자, 이재민 1만 6,000명, 가옥파괴 1만여동, 재산피해 62억원. 다이너마이트 24톤의 위력은 B29폭격기 12대가 한꺼번에 폭탄을 떨어뜨린 위력에 해당하는 것, 폭발현장은 깊이 10m, 직경 30m의 웅덩이로 변했다.

2001년 11월 12일 "홈런왕 맥과이어 은퇴"

어릴 때 부터 야구에 관심이 많았던 마크 맥과이어는 8살때 리틀 리그 AB란 곳에서 자신의 첫홈런을 기록했다. 그는 대학에 있던 초장 3년 동안 투수로서 활약했으나 UCC 코치가 그의 타격 재능을 보고 3루수로 전향시켰다. 그가 친 70호홈런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비싼 가격으로 300만달러라는 가격에 팔리기도 했다. 5,486타수만에 500홈런을 기록해 가장 500홈런에 빨리 도달한 선수가 되었다.그는 1999년 시즌이 끝나면서 4년 연속 50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고 7월의선수상도 받았으며 장타율·OPS 두 개 다 2위, 홈런은 65개로 또 다시 홈런왕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2000년에 35게임에 20홈런을 달성하고 4월 9일에는 1,500안타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부상이 그를 가로막았다.그는 2001년 11월. 카즈와 2001년 초 2년간 3,000만달러라는 재계약이 거의 확정적이었는데도 “그동안 나에게 많은 기회와 경험들,우정,추억을 안겼던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하면서 “내가 받는 만큼 활약을 못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 물러나는 것이 구단과 팬들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이라는 말을 남기고 멋진 은퇴를 했다.

1921년 11월 13일 "안창남, 저공 비행에 성공"

안창남은 도쿄-오사카 간의 우편 비행 경기에서 일본인들을 물리치고 우승,당시 자전거 경주에서 일본인을 누르고 우승한 엄복동과 함께 일제 시대 우리 민족의 우상이 되었다. “하늘에는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이 당시 유행어였다.1840년 11월 14일 "화가 클로드 모네 출생 "모네는 개인전에서 <수련이 있는 못>을 발표했을 때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알 수 없는, 그냥 팔레트를 문질러 아무렇게나 발라버린 그림”이란 혹평을 받았지만 그 당시 열린 만국박람회 전시회에서 비로소 인정받게 되었다.모네는 자기 식의 정원과 수련이 있는 연못을 직접 꾸미고 그곳에서 40여년을 작업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 <인상-해돋이>는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들을 인상파로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의 색은 태양의 광선에 따라 수시로 바뀌므로 대상물 자체의 고유색은 없다고 주장, 새로운 색채 감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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