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동부쪽의 폴란드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이에 발맞추어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부유럽연합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연합국은 폴란드에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면 연합국이 합심해서 독일을 공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그러나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까지 맺고 소련과 함께 폴란드를 침공한다. 독일과 소련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열심히 싸우며 영국과 프랑스가 약속한 지원군이 달려오기만을 기다렸다.그러나 폴란드인의 눈물겨운 저항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럽 최강의 두 국가의 협공과 믿었던 동맹국의 배신으로 결국 폴란드는 침략 한달여만에 완전 항복하게 된다.
1950년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 서울 수복(收復) "
6·25전쟁 과정에서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수도 서울을 한국군과 유엔군이 같은 해 9월 28일 탈환했다.북쪽의 의정부 방면을 제외하고 서울 시가지를 3면에서 포위한 한·미연합군은 25일 오후부터 시가전에 돌입, 밤이 깊어가면서 점차 서울 중심부로 조이기 시작하였다. 26일을 고비로 해서 북한군의 저항은 기가 꺾여 다음날 오전 6시 10분 한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고, 28일 수도 서울은 90일 만에 완전 수복되었으며, 다음날 정오 의사당에서 감격의 수도탈환식이 거행되었다.
1504년 9월 29일 " 갑자사화(甲子士禍) 발생 "
성종비(成宗妃)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1479년(성종 10년) 폐출(廢黜)되었다가 1480년 사사(賜死)되었다. 이에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공신들을 탄압할 결심을 했다. 그는 먼저 정 ·엄 두 숙의를 죽이고 그들의 소생을 귀양보냈다가 후에 모두 죽여버렸다. 그의 조모 인수대비도 정 ·엄 두 숙의와 한패라 하여 병상에서 타살하였다. 연산군은 폐비윤씨를 복위시켜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祠)하려 하였는데, 응교 권달수(權達手) ·이행(李荇)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보냈다. 또한 성종이 윤씨를 폐출하고자 할 때 이에 찬성한 신하들을 사형에 처하고, 이미 고인이 된 이들은 모두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연산군이 이같이 큰 참극을 벌인 까닭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평소에 눈엣가시처럼 싫어했던 선비들의 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이 사화로 성종 때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학계는 침체되었고, 또 연산군의 처사를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榜書事件)을 계기로 이른바 언문학대(諺文虐待)까지도 자행되어 이후 국문학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1990년 9월 30일 " 한국, 소련과 수교"
1990년 6월 4일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정상회담을 통해 한·소수교의 원칙을 합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884년 체결된 조러수호통상조약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1904년 파기되었고, 그 후 양국은 냉전을 거치면서 거의 교류가 없었다. 적대적이던 한·소관계는 1970년대 동서진영의 데탕트가 시작되면서 상호입국허용, 제3국을 통한 간접교역, 문화교류 등으로 점차 호전되었다. 그러나 1983년 9월 1일 ‘KAL기 피격사건’으로 개선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냉랭하던 양국관계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구상서(口上書)를 교환하는 것을 시작으로 소련이 올림픽에 788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참가시키면서 다시 호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9년 4월 3일 소련연방상공회의소 서울사무소가 개설되었고, 7월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모스크바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89년 11월 17일 양국간 영사처(Consular Depart ment) 설치를 합의, 86년만에 공식외교관계를 복원하였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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