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점심 종이 울리기 2분 전, 지진으로 천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 관동 지방을 진도 7.9의 격진이 강타한 것이다. 이와나미 서점에서 발행된 『근대 일본 종합연표』는 지진으로 사망자 91,344명, 전파 소실가옥 464,900동이라고 집계할 만큼 세기의 재변이었다. 이 천재지변 속에서 식민지 조선에서 건너온 힘없는 국민들은 인재지변까지 이중의 수렁에 빠져 목숨을 부지하는데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지진이 일어나고 난 후 공황 상태에서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해 일본인들은 6천-1만여 명의 조선인을 학살하였다(학살된 조선인의 숫자는 최소 6천명에서 2만명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은 지진 후, 한국인이 폭탄을 지니고 다닌다는 유언비어로 인해 4백명이나 잡아들였으며 그 때문에 일본국민들을 극도의 분노와 흥분상태로 몰고 갔다. 일본은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데다 대지진까지 발생하자 국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허위조작했던 것.참극은 대개 도쿄·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 지바현등에서 벌어졌으며 주동세력은 일본 정부였고 경찰, 군인들이 조선인들을 체포하고 학살했다.
1920년 9월 2일 "강우규 의사 의거"
을사조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만주로 떠나 동포 교육에 전념했던 독립 운동가 강우규 의사는 한국에 부임하는 사이토 제3대 총독에게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총독은 살해하지 못하고 37명의 사상자만 냈다. 그는 장익규, 임승화 등의 집에 숨어 지냈으나 일본의 앞잡이 김태석에게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1945년 9월3일 "토착 공산주의자인 현준혁 암살"
평양시 변두리의 한 커브길을 돌기 위해 구형 일제트럭이 속력을 줄이고 있었다.차안에는 민족주의 거두 조만식 선생과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 현준혁 비서가 타고 있었다.커브를 도는 트럭이 속력을 최대로 줄이자 골목에서 보고 있던 한 청년이 빠르게 달려와 트럭의 앞쪽으로 훌쩍 올라탔다. 순간 총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차안의 한 사람이 앞으로 푹 꺾였다. 인텔리 공산주의자 현준혁은 그렇게 암살됐다.경성제대 출신의 현준혁은 이론적 바탕을 갖고 있는 공산주의자로 평가를 받았고 공산주의자이면서도 조만식을 상징적 지도자로 하는 초당파적 연합전선 형성에 관심을 가져 특히 민족진영으로부터 주목받는 인물이었다.공산주의 명망가 현준혁의 암살 소식은 곧 평양시내에 퍼졌고 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긴장된 분위기가 퍼져갔다. 암살자에 대한 구구한 추측과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상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고 발생한 시간·장소·원인들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제각각이다.
1994년9월4일. "프로야구 선수단 집단이탈사건"
한국 프로야구사상 유례없는 선수단 집단이탈사건이 터졌다. 감독의 지휘방식에 반발하고 경기출전을 거부한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그 파문은 엄청났다. 결과는 윤동균감독의 사의표명, 주동자로 지목된 5명 가운데 박철순, 김형석, 김상호, 장호연은 벌금형으로 다시 유니폼을 입었고 강영수는 자유계약선수로 OB 울타리를 떠났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 태평양의 부름을 받은 강영수는 95시즌에 21홈런을 기록하며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고 새로운 야구인생을 개척했고 나머지 잔류파는 여느해 보다 더 알찬 해를 가꾸며 단일 시즌제가 채택된 89년이래 처음으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고 나아가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데 앞장섰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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