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한국 대동맥 ‘경부고속도로’준공
1970년 한국 대동맥 ‘경부고속도로’준공
  • 공문룡 칼럼니스트
  • 입력 2004-07-14 09:00
  • 승인 2004.07.1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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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

우리나라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가 70년 7월 7일 준공됐다. 68년 2월 착공, 전 구간이 왕복 4차선도로로 준공된 것. 현재는 길이 425.48㎞, 너비 22.4m, 왕복4∼8차선이다. 1971년 8월 31일 노선 이름이 서울-부산간고속도로(고속국도 1)로 지정되었고, 1985년 4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남이∼회덕 간 21.7㎞ 구간의 중부고속도로가 건설될 때 왕복6차선으로 확장됐다. 기존의 철도·국도와 중복을 피하면서 수도권과 영남공업지역 및 인천항과 부산항의 2대 수출입항을 연결하는 대동맥 역할을 하며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묶고 있다.판교분기점에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신갈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 남이분기점에서 중부고속도로, 회덕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의 지선, 비룡분기점에서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김천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금호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 언양분기점에서 울산고속도로, 양산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의 지선과 연결된다.

1971년 7월 8일 "백제 무령왕릉 발굴"

1971년 7월 8일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백제 제25대 무령왕릉은 공주박물관이 실시한 송산리 제5, 6호 고분 침수방지 공사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 동안 전문가들은 두 고분의 중간 바로 위 지점에 3, 4m의 소나무들이 들어서 있는 이 고분군을 단순히 6호 고분에 흘러드는 지하수를 막기 위해 만든 인조 언덕이거나 그냥 산줄기로만 생각했었다. 발굴 작업은 그해 10월말까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났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1994년 7월 8일 "북한 김일성 사망"

50여년간 북한을 철권통치했던 김일성이 지난 94년 7월 8일 사망했다.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인 김일성은 청년시절 소련에서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가 됐다. 8·15광복과 더불어 소련군을 따라 평양으로 들어온 김일성은 소련군의 힘으로 조선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 책임비서,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내각수상, 인민군 최고사령관을 맡고, 원수 칭호까지 썼다. 이후 중앙인민위원회 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 최고위직을 역임하였다. 남조선노동당 등의 국내파와 소련파 중 반대파인 옌안파 등을 숙청하여 권력체제를 구축하였다. 특히 6·25사변을 일으켜, 민족 상잔의 비극을 빚게 만든 인물이다. 그는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의 합병으로 사망했다.

1993년 7월 9일 "율곡비리 특별감사 결과 발표"

지난 93년 이날 감사원이 율곡비리 특별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율곡사업은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무기의 국산화’로부터 시작됐다. 각종 무기의 개발 혹은 국산화가 바로 그 것. 그리고 국산화가 불가능한 무기를 수입하게 됐는데 바로 율곡사업(무기획득사업)이 모태가 됐다. 한국에 무기를 판매하는 외국 회사들로부터 그 무기를 채택해주는 대가로 리베이트를 받게 됐는데 이 것이 ‘율곡비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율곡사업의 감사결과, 감사원은 118건의 부당 사항을 적발하고 국방부에 시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종구 전 국방장관 등 6명을 뇌물수수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1980년 7월 12일 "김대중 등 9명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구속"

80년 7월 12일 계엄사 합수부가 김대중 등 9명을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김대중은 79년 10·26사태로 유신체제가 붕괴된 뒤, 그해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되고, 다음해인 80년 2월 사면 복권됨으로써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다.그러나 12·12사태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이른바 5·17조치를 감행하였는데, 김대중은 이때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사회불안 조성 및 학생·노조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로 수사기관에 연행됐다. 이어 그해 7월 12일 내란음모·국가보안법·반공법 등의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그리고 9월 17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이후 서방 각국의 지도자와 현지 교포들이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고, 군사정권은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이어 1982년 12월에는 그를 석방하였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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