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73년 6월 22일 개통됐다. 하동과 남해를 잇는 남해대교는 길이 660m, 높이 80m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개통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일컬어지고 있다.남해대교가 가로지른 노량해협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일어난 곳이다. 남해군 최고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1977년 6월 22일 "김형욱미국 의회 증언"
1977년 6월 22일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미국 의회에서 충격적인 증언을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형욱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중앙정보부장 중에서도 재직 중에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특히 박 정권에 대한 비난을 가하면, 그의 권총 위협을 당해야 했다. 그러던 그가 정보부장자리에서 물러나는 등 박 대통령으로부터 ‘팽(?)’당하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77년 이날 김형욱은 미국 의회의 증언대에 섰다. 그리고 증언대에서 그는 한 때 몸담았던 박 정권에 직격탄을 날렸다. 유신 독재체제에 반기를 든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한 북한 인민군은 전쟁 3일 만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를 긴급 소집했다. 그리고 안보리는 북한의 38도선 이북 철수를 결의하고 전쟁 개입을 결의했다. 국제 사회의 개입이 전쟁을 확대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인도 등 일부 국가가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지만 결의안은 통과되었다. 그리고 최초로 유엔군이 창설되어 미국의 맥아더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전쟁 한달만에 인민군은 경상남북도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전진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저지되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쌍방간의 치열한 공방전, 소모전 속에서 미군과 한국군의 전력이 증강되고 있었음에 비해 인민군의 전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전력의 열세 뿐만 아니라 보급 문제 역시 북한군을 괴롭혔다. 확실히 전쟁의 초기 국면에 있어서 지상의 주도권은 인민군에게 있었다. 하지만 하늘과 바다에서는 달랐다. 미군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 미 공군의 평양 비행장 폭격 이후 북한군은 공군 없는 전쟁을 치러야했다. 이러한 때에 9월 15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이 작전은 전세를 급변시켰다. 북한군은 허리가 끊어지는 타격을 받았고, 북한군이 패주하는 속에서 유엔군은 9월말에는 38선 이남의 거의 모든 지역을 재장악하였다. 이에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하며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다.결국 3년여만에 휴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우리 민족에는 영원한 상처로 남게 됐다.
1989년 6월 27일 "서경원, 국보법으로 구속"
평민당 소속의 서경원 의원이 북한을 방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지난 89년 6월 27일 구속됐다.서 의원은 유럽여행 중 성낙영 목사를 통해 접촉한 북한 인사 정모씨의 주선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1988년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흘간 북한을 방문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던 것이다. 안기부(현 국정원)는 당시 서 의원이 북한 체류 중 허담이 배석한 가운데 김일성 주석과 면담, 통일문제 등에 관해 회담을 가졌으며 김일성으로부터 5만 달러를 건네받아 간첩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또 수사당국은 당시 김대중 평화민주당(평민당) 총재의 관련여부를 밝히기 위해 수사력을 집중했다. 서 의원 공판이 진행되면서 서경원 의원은 수사과정에서 안기부의 가혹행위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해 정치적인 쟁점이 되기도 했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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