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결과 여당인 공화당이 압승했다. 특히 공화당은 개헌선을 돌파,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 7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기 한달 전인 67년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어렵지 않게 다시 당선됐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제 7대 국회의원 선거는 극도의 혼탁상을 면치 못했다. 여당인 공화당이 3선 개헌에 필요한 국회의석 3분의 2 이상을 확보하기 위해 광범위한 부정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69년에 들어 3선 개헌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결국 9월 14일 개헌지지서명을 했던 122명의 의원들은 야당 의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던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국회 3별관에서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결국 3선 개헌안이 확정됨에 따라 박정희 정권은 장기집권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1987년 6월 10일 "6·10 항쟁"
87년 6월, ‘4·13호헌 조치’·‘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으로 민심이 들끓고 있었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 음모가 노골화되면서 민중의 저항 의지가 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그러던 중 그해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노태우씨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결국 6월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6월 10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22개 도시에서 수십만명의 국민들이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거리를 메웠다. 초조해진 정권은 시위대를 무력진압하기 시작했다.정권의 강경진압이 계속되면서 ‘넥타이 부대’가 가세,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6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직선제 개헌의 수용과 구속자 석방 및 김대중씨의 사면·복권’을 핵심 내용으로 6·29 선언을 발표했다.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 발족"
1950년 6월 12일 중앙은행 겸 발권은행인 한국은행이 발족했다. 한국 최초의 중앙발권은행인 구 한국은행은 1909년 10월에 설립됐다. 하지만 일제시대인 1911년 2월 ‘조선은행법’이 시행됨에 따라 같은 해 8월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어 8·15광복 때까지 존속됐다. 광복후인 1950년 6월 12일 새로이 한국은행은 설립됐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화폐발행과 통화신용정책의 수립 및 집행, 은행의 은행, 정부의 은행, 지급결제제도의 운영·관리, 외화자산의 보유·운용, 은행 경영분석 및 검사, 경제조사 및 통계작성 등의 기능을 수행한다. 주요 업무는 일반업무와 발권업무, 국고업무, 외국환업무, 은행감독업무 등이다.
1994년 6월 13일 "북한, IAEA 탈퇴 선언"
1994년 6월 13일 북한이 전격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 한반도에 전쟁위기가 확산됐다. 지난 1957년 설립된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연구와 국제적인 공동관리를 위한 국제연합 기구다. 한국은 1957년도에 가입했고, 북한은 1974년에 가입했다. 특히 북한은 1993년 2월 IAEA가 특별핵사찰을 요구한 데 대해 1994년 6월 13일 IAEA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로부터 제재를 받을 위기에 몰렸다가, 1994년 미국과 경수형원자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IAEA 탈퇴문제는 해소됐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