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군사독재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집착하였고 솟구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저곡가 저임금 정책은 경제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으며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압살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우선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은 전국적으로 그칠 줄 모르고 전개됐다.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신군부는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하여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음, 당시 분출되고 있던 전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세력을 탄압해야 했다. 결국, 신군부에 대항해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이 시작했다. 신군부는 계엄군을 투입, 대량 학살의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결국 피의 진압으로 5·18민중항쟁은 끝났지만 그 후 청년학생을 비롯한 양심적인 민주인사들과 민중운동에 의해 신군부를 역사의 심판대에 세움으로써 항쟁의 정당성은 온 천하에 입증되기에 이르렀다.노태우정부가 들어선 뒤 정식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받았고, 사건 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1995년에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책임자들을 구속하고, 사망·부상자에 대한 보상이 정해졌다.
1985년 5월 21일 "서울대와 고려대생 미국문화원 점거"
80년 광주민주항쟁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게 된다. 80년대 들면서 본격적인 반미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그 중에서도 세간에 가장 기억에 남는 반미운동 사건으로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 꼽힌다. 이날 대학생 73명이 서울 미문화원을 3일간 점거한 채, 광주학살의 배후 조종자로서 미국에 책임을 추궁했다. 이들은 “우리는 왜 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나” 등의 성명서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천명했는데, 그것은 광주항쟁 당시 미 작전권 하의 군이 광주에 투입된 것에 대한 미국의 공개 해명 및 사과, 군사독재에 대한 지원 중단, 워커 주한 미 대사와의 면담 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요구를 내걸며 72시간 동안 계속되었던 농성은 곧 개최될 남북 적십자회담 등을 고려, 마침내 27일 평화적으로 끝났다. 그 결과, 함운경 등 25명의 학생이 구속되고 43명이 구류, 5명이 훈방되면서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은 그 막을 내렸다.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미국의 역할은 과연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강력한 의문을 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제기했다는 점에서 반미운동의 새로운 시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1983년 5월 22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개통"
1983년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됐다. 지하철 2호선은 서울의 중심부를 동서로 흐르고 있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시청을 기점으로 하여 강북의 기존 도심 구간과 잠실 영동을 중심으로 한 신개발지, 그리고 관악, 영등포 지역을 연결하는 순환선으로 지상 지하 구간을 겸용하는 기본 노선이다.
1980년 5월 24일 "김재규 교수형 집행 "
1980년 5월 24일 ‘10·26사태’의 주역 김재규가 서울 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김재규는 한때 교직생활을 하였으나, 군에 입대하여 육군대학 부학장 등을 역임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보안사령관·군단장 등을 역임한 후 예편, 1973년 9대의원(유신정우회), 1974년 건설부장관을 거친 뒤 1976년 중앙정보부장이 됐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 중인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만찬회 석상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등을 권총으로 사살, 이른바 ‘10·26사태’를 일으키고 체포되었다. 1980년 1월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5월 24일 교수형을 당했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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