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4월 27일 "안기부 황석영 체포"
소설가 황석영씨가 93년 4월 27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김포공항에서 체포돼 구속됐다.황씨는 지난 89년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비밀리에 방북했다가, 이날 국가보안법 ‘반국가단체 잠입죄’로 구속된 것이다. 그는 89년 방북했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베를린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 체류했다. 그러다 이날 귀국했으며 안기부에 의해 체포됐다. 이어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98년 사면돼 석방됐다.
1960년 4월 28일 "이기붕 일가족 자살"
4·19혁명의 여파로, 이승만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씨 일가족이 60년 4월 28일 경무대에서 자살했다. 이기붕씨는 이승만 전대통령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 1949년 서울특별시 시장, 1951년 국방부 장관 등 주요 요직을 거치며 정권 2인자로 발돋움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지난 51년 이범석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 2년 후 이범석의 족청계 세력을 축출하고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 일단 부결된 것을 사사오입으로 번복, 가결을 강행하기도 했다. 1956년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고,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 때 공개·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에 피신해 있다가 당시 육군장교이던 장남 강석이 권총을 쏘아 전가족이 자살했다.
1959년 4월 30일 "경향신문, 필화사건으로 폐간"
59년 4월 30일 경향신문이 ‘여적’필화사건으로 결국 폐간됐다. 사건의 단초는 59년 2월 4일 경향신문의 고정 칼럼인 ‘여적(餘滴)’ 난에 ‘다수의 횡포’라는 글이 실리면서부터. 시인인 주요한이 쓴 이 글은‘외국인 교수의 논문에 대한 단평 형식으로 집권당과 정부를 비판한 내용’이었다. 당시 천주교가 발행하는, 대표적인 야당지로 성가를 높이고 있던 경향신문을 못마땅하게 여겨온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경향신문에 ‘내란선동’죄를 덮어씌웠다. 그 결과로 경향신문은 4월 30일 폐간된 것이다.
1989년 5월 3일 "부산 동의대 참사사건 발생"
1989년 5월 3일 부산 동의대 참사사건이 발생했다. 동의대 사건은 지난 89년 1월 입시부정 사건이 발단이었다. 그해 4월 이 대학의 입시부정이 폭로되면서 학생의 항의와 시위 및 경찰의 진압으로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진압에 대항하는 학생들의 화염병으로 화재가 발생, 경찰관 7명이 숨지는등 희생자들이 나왔다. 이 사건으로 동의대생 71명이 구속 기소됐고 수십명이 방화치사상등의 혐의로 중형을 선고받았다. 6공화국 들어 단일시국사건으로서는 최대규모였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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