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전두환·김대중·김영삼 등 해금 실시
1985년 전두환·김대중·김영삼 등 해금 실시
  • 공문룡 칼럼니스트
  • 입력 2004-03-11 09:00
  • 승인 2004.03.1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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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3일 <한국방송공사 창립>
한국방송공사(KBS)가 지난 73년 3월 3일 창립돼, 공영방송으로서 출범했다. KBS는 1927년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 그 시초. 그리고 1947년 정부 수립과 함께 중앙방송국으로 출발했다.이어 53년 서울 중앙방송국으로 개편됐고, 1961년 서울 국제방송국과 서울 텔레비전방송국을 개국했다. 1968년 3개 방송국을 통합하여 중앙방송국으로 다시 개편하고, 1973년 한국방송공사(KBS)로 출범했다. 1980년 언론통폐합조치에 따라 동양방송·동아방송 등 5개 민간방송을 인수했으며, 같은 해 컬러텔레비전 방송과 교육방송(UHF)을 시작했다. 1986년 시청료납부 거부운동으로 한때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방송을 주관했다. KBS는 현재 KBS 1TV와 KBS 2TV 그리고 위성방송 KBS Korea 등의 TV채널을 운용하고 있다. 또 1,2,3 라디오와 1,2 FM 그리고 사회교육방송과 RKI 등의 라디오채널을 운용하고 있다.

1920년 3월 5일 <조선일보 창간>
1920년 3월 5일 한국의 대표적인 신문인 조선일보가 창간됐다. 조선일보는 창간 당시 동아일보 등과 함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역할을 해냈다. 특히 항일적인 논조로 창간 반년도 되지 않은 1920년 8월에 민간지 가운데 최초의 정간을 비롯해서 1920년대에 4차례나 정간을 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그러다 1933년 자금난에 빠진 조선일보를 평안도출신의 광산재벌 방응모씨가 인수·운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후 조선일보는 그동안의 민족지 이미지와는 달리 친일 신문 논란과 보수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조선일보는 문맹퇴치, 농촌계몽운동 등을 벌여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40년 8월 10일 일제의 강요로 신문 발행을 중단하게 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3일에 복간되기도 했다. 현재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정보화-환경운동, 전시·공연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1985년 3월 6일 <전두환 대통령,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14명 전면 해금 실시>
1985년 3월 6일 민주세력의 저항에 부딪친 군사정권은 그간 정치 규제자로 묶어 뒀던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에 대한 전면 해금을 실시했다.80년대 중반 군사세력의 억압을 받던 재야 민주화세력이 연대를 통하여 뭉치기 시작했다. 1985년 9월 민중민주운동협의회가 민주통일국민회의와 통합되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 결성되기도 했다. 또 재야 야권에서도 1984년 5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조직되어 새로운 정치결사체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1985년 1월 선거일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신생야당이 등장하였다. 3차에 걸쳐 정치 규제자들이 해금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한 정당이 결성되었다. 바로 <신한민주당>이 창당됐다. 신한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신생야당은 정치권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였다. 헌법과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이 새로운 정치쟁점이 되었고 여기에 미국에서 귀국한(1985년 2월 8일) 김대중이 신한민주당의 바람을 일으켰다. 선거결과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은 대도시에서 압승을 거두어 제1야당으로 급부상하였다. 이는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에 정치적 위기감을 가져다주었으며 기존 야당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기존 제1야당인 민한당은 의석수의 획득에서 크게 신민당에 미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속 의원들의 신민당 입당으로 공중 분해되었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예상외의 성공을 거둔 신민당은 양심수 및 구속학생 석방 등을 정부에 촉구했다. 결국 군사정권은 이해 3월 6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3김 등 정치규제자들을 해금시켰다.

1890년 3월 8일 <육당 최남선 출생>
1890년 3월 8일 육당 최남선이 태어났다. 최남선은 일제치하에서 잡지 <소년>을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특히 1919년 3 ·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최남선 행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 교수가 되는 등 친일행각이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 등을 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혔다. 광복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됐다. 6 ·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사망했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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