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인류의 비극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인류의 비극 제2차 세계대전
  • 공문룡 칼럼니스트
  • 입력 2003-09-04 09:00
  • 승인 2003.09.0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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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9월 2일 "안중근 의사 출생 "
1909년 초대 조선 총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북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의 충격을 가한 안중근 의사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러시아 관원의 조사를 받고 일본측에 넘겨져 여순감옥에서 취조를 받은 안중근 의사는 취조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의 죄상을 낱낱이 지적하며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정당성을 밝혔다. 투옥기간중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는 등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21살의 나이로 역사의 이정표를 세운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39년 9월 3일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독일에 대해 선전포고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영국 총리 네임 챔벌린은 잔인한 적과 끝까지 싸우기 위해 영국국민들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흘전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진격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즉각 독일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폴란드에 대한 모든 공격행위를 중단하고 철수하지 않을 경우 영국과 프랑스는 상호방위조약을 이행하기 위해 폴란드를 적극 지원할 것을 통보했다. 독일은 예상대로 최후통첩을 무시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에 돌입했다. 영국은 즉각 독일 봉쇄를 선언하고 거리에는 징집 벽보가 붙었다. 프랑스도 전군 동원령을 내리고 서부전선 방어를 강화했다.

1990년 9월 4일 "제1차 남북총리회담 "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가 남북총리회담을 위해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해 서울에 도착했다. 도착 다음날부터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남북총리회담이 시작됐다. 우리측 수석대표는 강영훈 국무총리. 한반도 긴장완화와 남북교류와 협력을 위한 남북총리회담은 남북간 고위당직자들의 최초의 회담이었다.강영훈 총리는 남북이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전제하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를 채택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측은 팀스피리트 훈련중지와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포기, 방북구속자 석방문제를 들고 나왔다. 남북한의 입장차이는 두 체제의 차이만큼 컸다.

1991년 9월 6일 "소련, 발트 3국 독립인정"
소련은 발트해 지역 3개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보리스 판킨 소련외무장관은 이날 국가회의에서 발트해 공화국들의 독립이 승인됐다고 공식발표했다. 이로써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는 51년만에 다시 독립국가로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발트해 공화국들은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의 집권당시 비밀리에 체결된 몰로토프-리벤트로트 조약에 의해 1940년 소련에 강제 합병됐다. 발트지역 3개공화국은 독립찬반투표를 통해 75% 이상의 찬성으로 독립을 지지했다.

1988년 9월 6일 "호남선 복선화 완공"
대전에서 목포에 이르는 국토의 동맥 호남선 철도. 이리에서 송정리구간의 철도복선 공사가 완공됐다. 이 구간의 완공으로 전북 이리에서 전남 송정리간의 102㎞에 달하는 호남선 복선화 공사는 착공 7년 6개월만에 모두 끝났다. 이로써 호남선의 하루 철도 운행 능력은 35회에서 70회로 늘어났다,

1822년 9월 7일 "브라질 독립선언"
남미의 브라질이 독립을 선언했다. 브라질은 1530년 포르투갈인 마르틴 마폰스 데 소자에 의해서 식민지가 됐다. 포르투갈의 섭정공 돈 주앙은 1815년 수도를 리우데자네이루에 두고 브라질을 식민지 상태로 되돌리려 했다. 이에 반발한 섭정 황태자 돈 페드로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왕정을 선포함으로써 브라질은 식민지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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