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신출귀몰’ 탈옥수 신창원 검거
1999년 ‘신출귀몰’ 탈옥수 신창원 검거
  • 공문룡 칼럼니스트
  • 입력 2003-07-16 09:00
  • 승인 2003.07.1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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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15일 기아그룹, 부도 유예
봉고 신화를 통해 한국 제2의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하며 재계 7위 자리를 지키던 기아그룹. 방만한 경영과 아시아 자동차에대한 투자실패 등으로 부도 위기를 맞았다. 결국 1997년 오늘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이 기아그룹의 18개 계열사에 대해 부도유예협약을 적용했다. 기아는 그러나 부도유예협약을 적용받고도 경영 정상화를 위한 해결방안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 그사이 기아의 5만4천여명 직원 가운데 만여명이 회사를 떠났고 기아협력업체 수천개가 연쇄도산하면서 국가경제 전체에 큰 부담을 줬다. 부도유예협약 1년 뒤인 1998년 오늘 정부와 채권단은 기아 자동차에 대한 국제 입찰 공고를 내고 사태해결에 들어갔다. 기아 인수전은 현대와 대우 그리고 삼성과 포드의 4파전 양상을 보이다가 결국 현대 자동차가 기아의 주인이 됐다. 97년 10월 29일 사퇴한 김선홍 기아그룹회장은 부실 계열사에 거액을 지급보증한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1999년 7월16일 탈옥수 신창원 검거
무기수로 11년 넘게 복역하다 탈옥한 뒤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을 벌여온 탈옥수 신창원은 탈옥한 지 2년6개월만인 1999년 오늘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서 붙잡혔다. 검거 당시 아파트에서는 만원권 지폐 1억8천만원과 탈옥생활을 기록한 일기장등이 발견됐다. 경찰 조사 결과 신창원은 도주 기간동안 서울, 경기, 충남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백여차례의 강·절도 행위로 5억여원의 금품을 털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여러명의 동거녀가 그의 도피를 도왔던 사실도 밝혀졌다. 전북 김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범죄의 그늘에서 살아 온 탈옥수 신창원은 2년반 동안의 도피생활 동안 그를 놓친 경찰관 40여명이 불명예 퇴직을 당해야 했다.

1995년 7월18일 김대중씨 정계 복귀
6·27 지방선거가 끝난지 20일 뒤인 1995년 오늘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정계은퇴 3년 6개월만에 정치재계를 선언했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에게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씨의 정계복귀 여부는 1995년 지방선거 유세기간 내내 정가의 관심거리였다. 6·27 지방선거 준비가 한창이던 1995년 6월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정당연설원으로 등록해 민주당 후보의 지원 유세에 나서겠다고 밝혀 정계 복귀를 공론화했다. 여당은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뒤집는 것은 젊은 정치인의 성장을 가로막는 일이라며 비난했다. 김대중씨는 결과적으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며 자신의 정치재개 이유를 민족의 운명이 중대한 기로에 섰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정계복귀 두달뒤 김대중씨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민주당과 결별했다.

1965년 7월19일 이승만 전대통령 사망
우리나라 초대대통령인 우남 이승만은 1965년 망명지 하와이에서 아흔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 전대통령의 유해는 미국 공군수송기에 실려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4·19혁명으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뒤 고인이 돼 돌아온 이승만 전대통령은 집권시 과오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표정에는 애도의 분위기가 넘쳤다.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써왔고 우리나라 근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이승만은 숨진뒤 아흐레 뒤인 7월 27일 정든 이화장을 떠났다. 5백여개의 만장이 운구행렬을 이끌었고 수많은 국민들이 거리에 나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승만 전대통령의 유해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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