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동안 북한을 통치해온 북한 주석 김일성이 1994년 오늘 새벽 2시 심근경색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 북한은 34시간이 지난 뒤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식 발표했다. 북한방송들은 시신이 주석궁에 안치돼 있고 외국 대표단의 조문은 받지않는다고 보도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의 유해는 사망한 지 나흘만인 7월 11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1912년에 태어나 여든두해를 살면서 반평생을 북한의 최고권력자로 살다간 김일성 북한 주석은 일제시대 김성주에서 김일성으로 이름을 고치고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해방이 된 1945년 김일성은 소련군 소좌의 계급장을 달고 북한에 나타났다. 당시 나이 서른 셋이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김두봉, 허가이 등 정적들을 숙청해가면서 권력장악에 성공했다. 1948년 9월 9일 조선인민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총리 자리에 오른 김일성은 1950년 6·25전쟁을 일으켜 한민족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비극을 남겼다. 주체사상을 제창해 신격화에 성공한 김일성은 1972년 국가 주석에 취임했다. 부자간의 권력 승계를 하면서까지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려했던 김일성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과 사상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17일 앞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 북측단장인 김용순은 7월 11일 정상회담의 연기를 우리측에 통보하고 정상회담 합의는 유효하다고 밝혔다. 북한 주석 김일성의 사망으로 우리나라는 조문파동 등 한차례 홍역을 치르게 됐다.
1993년 7월10일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했다. 클린턴의 우리나라 방문은 대통령 취임후 첫 해외방문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과 청와대 녹지원 주위을 돌며 방한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간소복 차림으로 정상회담을 갖고 북한핵 문제를 비롯한 두 나라의 공동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두나라 정상은 북한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굳건한 안보협력의 필요성을 재확인하고 경제협력 분야를 과학기술산업 분야까지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청와대와 백악관을 잇는 24시간 직통전화 체제를 마련해 언제든지 의견을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0년 7월11일 "한-일-홍콩 해저 광케이블 개통"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홍콩을 잇는 해저 광케이블이 1990년 오늘 개통됐다. 총길이 4,600km! 이 해저 광케이블의 개통으로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국제 해저광통신시대가 열렸다. 공사에 사용된 광케이블은 PVC와 강재 등으로 특수피복처리돼 자체무게로 바다 밑바닥에 깔리게 됐다. 심해용 광케이블은 수심 8,000m의 수압에도 견딜 수 있는 특수 케이블이다. 광케이블을 보호하기 위해 해저면 1m 깊이까지 파묻혔다. 이 해저광케이블 개통에 이어 1993년에는 울릉도와 내륙를 잇는 160km의 해저 광케이블 공사도 끝났다.
1948년 7월12일 "제헌헌법 국회 통과 "
제헌국회는 대통령제와 국회단원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한민국 헌법을 의결했다. 대한민국의 법적기초를 밝힌 우리나라 첫 헌법이다. 두달 전 5·10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제헌국회는 당초 의원내각제와 양원제국회를 골격으로 하는 헌법초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승만 제헌국회의장의 강력한 반대로 대통령제와 단원제 국회를 골격으로 하는 수정안이 채택됐다. 이에 앞서 한반도 신탁통치 방법을 논의하던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UN은 1948년 2월 선거가 가능한 남한지역에서의 헌법제정을 위한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다. 이같은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제헌국회는 닷새 뒤인 7월 17일 의결된 헌법을 공포했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