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7호> 1999년 북한 금강산 관광객 억류
<제477호> 1999년 북한 금강산 관광객 억류
  • 공문룡 칼럼니스트
  • 입력 2003-06-18 09:00
  • 승인 2003.06.1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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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17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 평양 방문>
지미 카터 전미국 대통령이 미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권한을 위임받지 않은 순수한 미국 시민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카터는 김일성 북한 주석과 잇따른 회담을 갖고 북한핵 문제로 조성된 한반도의 긴장국면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동강 유역, 김일성의 요트에서 열린 회담에서 카터는 김일성에게 북한이 핵개발 동결과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을 포함한 핵투명성을 보장한다면 UN안보리를 통한 북한 제재 중단과 북한과의 3단계 고위급회담을 갖겠다는 클린턴 행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김일성은 미국이 원자로 건설을 지원하고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보장한다면 미국의 제안을 수락하겠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또 카터에게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회담을 희망한다고 밝히고 중재를 부탁했다. 북한 핵문제 때문에 한때 전쟁위기 상황으로 치닫던 한반도에 다시 협상의 분위기가 찾아왔다.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 명령>
이승만 대통령은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에게 반공포로들을 극비리에 석방할 것을 명령했다.미국이 포로들은 자신이 돌아가기를 원하는 나라로 송환한다는 자유송환 원칙을 포기하고 중립국의 관리 아래 둔다는 공산측의 주장에 합의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당시 UN군 관리 아래 남한에 있던 13만여명 가운데 반공포로는 약 3만5,000명이다. 수용소에 근무하던 한국군 헌병들은 UN군 헌병들의 눈을 피해 새벽에 수용소문을 일시에 연다. 합법적 석방이 아닌 탈출을 감행함으로써 자유를 찾았다. 2만7,000여명의 반공포로들이 자유대한의 품에 안겼다.

1946년 6월 19일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발표>
미 군정청은 국립 서울대학교설립안을 발표했다. 경성대학과 8개 관립전문학교, 사립학교인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한다는 내용이다. 설립안이 발표된 뒤 두달만인 8월 22일 9개 단과대학과 한개의 대학원으로 국립 서울대학교가 탄생했다. 서울대학교는 6·25전쟁 중에도 부산등지에서 전시연합대학을 구성해 강의를 계속했다. 휴전 후 서울캠퍼스로 복귀한 서울대학교는 1975년 지금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했다.

1999년 6월 20일<북한 금강산 관광객 억류>
금강산 관광길에 나섰던 우리 관광객 한명이 북한에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36살의 주부 민영미씨. 구룡폭포를 돌아본 뒤 북측 감시원과 대화를 나눈 것이 화근이었다. 민씨가 “귀순자들이 잘 살고 있다. 통일이 되면 좋겠다”고 말한데 대해 북측은 “귀순공작을 벌였다”며 민씨를 억류했다. 민씨는 이틀 뒤 외국인 전용 호텔인 금강산여관으로 숙소를 옮긴 뒤 북측의 강요에 따라 ‘귀순공작’ 사죄문까지 작성했다. 민영미씨 억류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는 북측에 강력히 항의하고 금강산 관광선의 출항을 중단시켰다. 결국 북한은 억류 엿새째인 6월 25일 민영미씨를 풀어줬다. 이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객의 신변 안전 문제에 의문이 제기됐고 남북한이 이에 대한 협상을 매듭 지은, 사건발생 한달 보름만에 금강산 관광은 재개됐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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