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6호> 1999년 남북한 서해에서 교전하다
<제476호> 1999년 남북한 서해에서 교전하다
  • 공문룡 칼럼니스트
  • 입력 2003-06-17 09:00
  • 승인 2003.06.1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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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10일 6·10 만세운동
조선왕조 마지막 왕 순종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시민과 학생 등 4만여명은 순종의 인산행렬이 지나는 길목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7년 3개월만이다. 활화산처럼 다시 솟아오른 6·10만세운동은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되지 못했지만 또다른 대규모 항일 운동으로 기록됐다. 3·1 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이은 6·10만세운동은 3년반 뒤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 정식 발족
한국은행이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으로 정식 발족했다. 일제시대인1911년 3월 29일 설립된 조선은행이 한달전 공포된 한국은행법에 의해 이름이 바뀌었다. 6·25 전쟁당시 파괴됐던 한국은행의 본관 건물도 1958년 1월 18일 복구됐다. 공사 비용은 당시 돈으로 6억원이었다. 준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했다.

1968년 6월 13일 프랑스, 소르본 대학 휴교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이 700년만에 처음으로 문을 닫았다. 드골의 우익정권에 반기를 든 소르본 대학생들은 몇개월 째 노동조합과 연계해 우익 드골정권의 퇴진 운동을 벌였다. 시위는 격화되고 진압 경찰은 소르본 대학안으로 들어와 유혈 사태를 빚었다.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로 프랑스는 내란의 위기에 직면했다. 모택동 사상에 심취한 시위 주동 학생들은 드골 대통령을 ‘암살범’이라고 주장하면서 드골정권의 퇴진을 계속 요구했다. 군대의 출동으로 시위학생들은 체포되고 소르본 대학은 휴교에 들어갔다.

1982년 6월 14일 포클랜드 전쟁 종결
아르헨티나군이 영국군에 항복함으로써 포클랜드 전쟁이 끝났다. 영국군 사망자 255명, 아르헨티나군 사망자 712명이었다. 포클랜드의 스탠리항에 상륙한 영국군이 영국 국기를 게양했다. 포클랜드의 영유권을 두고 영국과 오랫동안 마찰을 빚었던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를 무력 점령할 당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고 경제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인 갈티에리 장군은 포클랜드가 영국 본토에서 1만2,860Km나 떨어져 있어 영국의 군대 파견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다. 대처 영국 총리는 이같은 예측을 뒤엎고 즉각 40척의 해군기동함대를 출동시켰다. 미국 주도의 평화중재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5월 20일 드디어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전쟁에 돌입했다. 서방의 지원과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영국은 포클랜드를 완전포위하고, 포클랜드 주둔 아르헨티나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전쟁 개시 75일만에 포클랜드 전쟁은 끝이 났다.

1999년 6월 15일 남북한 서해 교전
북한 경비정 10여척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영해를 침범한지 아흐레째가 되는 1999년 6월15일 인천 연평도 서쪽에서는 우리 해군함정과 북한 경비정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우리 해군함정이 진입을 저지하자 북측이 먼저 기관포 공격을 해왔고 우리해군이 응사하면서 교전이 시작됐다. 14분간 계속된 이 교전에서 북한 경비정 1척이 침몰되고 1척이 불타는 등 경비정 6척과 어뢰정 1척이 피해를 입었다. 우리측도 장병 9명이 부상했다. 정부의 햇볕 정책으로 해빙 분위기를 타던 남북관계는 서해교전과 닷새뒤 일어난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씨 억류 사건 등으로 한동안 긴장 상태가 계속됐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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