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오늘 저녁 7시 48분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담화문을 통해 이날 저녁 8시부터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 이루어 진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김대통령은 이어 법개정을 통해 금융실명제를 추진할 경우 예상되는 부작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국회에서의 법개정 절차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혔다. 정부는 이어 두달 동안의 경과기간을 두고 이 기간 동안 실명으로 전환되는 최고 5,000만원까지의 금융자산에 대해서는 자금출처 조사를 면제한다고 발표했다.
1996년 8월 13일 "한총련 연세대 점거 시위"
전국의 대학생 5,000여명이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밤샘농성에 들어갔다. 한총련 즉 한국 대학총학생회연합이 통일 대축전 행사에 북한대표를 초청하기로 한데 대해 정부가 이적행위로 규정하면서 행사를 원천봉쇄했기 때문이다.통일대축전 전야제를 벌인 학생들은 다음날 범청학련 베를린 공동사무소와 함께 정부가 불허한 남북해외청년학생 연석회의를 강행했다. 경찰 6,000여명을 동원해 시위학생검거와 해산작전에 들어갔지만 학생들은 투항을 거부했다. 연세대 점거 시위 6일째, 경찰은 또다시 병력을 투입하고 음식물 반입을 차단하는 압박작전을 펼쳤다. 사흘 뒤인 8월 20일 경찰이 헬기로 최루탄을 살포하고 2,000여명의 경찰력을 대학 건물에 투입하자 학생들은 결국 투항의사를 표시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한총련 사태로 5,848명이 경찰에 연행돼 462명이 구속됐고 3,000여명이 불구속 입건됐다. 이 가운데 222명이 구속기소되면서 단일사건으로는 사상 최대 인원이 사법처리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무조건 항복 "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히로히토 일본 국왕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 공식 항복문서는 18일이 지난 9월 2일 미국 군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조인됐다.만 6년여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순간이다.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인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승자와 패자 모두 밝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나라는 35년간의 일본 압제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게 됐다. 그러나 8월 20일과 25일 우리나라에 진주한 소련군과 미군이 38도선을 경계로 우리나라를 분할 점령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군과 소련군의 주둔으로 광복의 기쁨이 우리 민족에게는 분단의 슬픔으로 바뀌었다.
1980년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 하야 "
최규하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제10대 대통령직을 사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광주사태 등 국내 소요사태에 책임을 통감하고 평화적 정권이양을 위해 사임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국무총리로 재직 중이던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로 같은해 12월 6일 대통령직을 승계한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장군 주도의 신군부 세력에 실권을 넘겨주고 대통령이 된지 8개월만에 스스로 청와대를 떠났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북한군 장교 두명과 사병 30여명이 미군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미군과 한국군 장교와 사병 11명은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 초소 부근의 미루나무 가지를 제거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제거하지 말라는 북한군의 요구를 무시하고,작업을 계속하자 북한군이 갑자기 공격했다. 이 사건은 북한 김일성 주석이 유엔측에 사과문을 전달함으로써 일단락됐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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