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UN군 서울 탈환
1950년 UN군 서울 탈환
  • 공문룡 칼럼니스트
  • 입력 2003-09-26 09:00
  • 승인 2003.09.2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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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9월 23일 "천재소년음악가 고별연주"서울 배재중학교 강당에서 두 소년 음악가의 연주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당시 연희초등학교 6학년 바이올리니스트 이희춘군과 배재중학교 1학년 피아니스트 한동일군의 무대였다. 스웨덴으로 음악유학을 떠나기 전에 여는 두 소년의 마지막 연주회. 관중들은 두 천재소년의 뛰어난 연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이들의 앞날을 축복했다.

1966년 9월 24일 "육사 화랑대 준공식"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새 사열대인 화랑대 준공식이 거행됐다.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군고위 장성, 육사 제2기 졸업생이 참석했다.화랑대는 20년전 이날 같은 자리에서 입교식을 가졌던 육사2기생들이 모교를 위한 기념사업의 하나로 세웠다. 준공식에서 육사2기생인 박정희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이 화랑대는 육사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전하는 따듯한 정의 상징이라고 말하면서 선배들의 뜻을 이어 후배들이 구름같이 쏟아져 나와 국가를 위한 새로운 동량이 돼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1998년 9월 25일 "한-일 어업협정 교섭타결"
한국과 일본간의 새로운 어업협정 체결 교섭이 최종 타결됐다. 앞서 일본은 1965년에 체결된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한일양국은 동해의 131도 40분과 135도 30분을 각각 서쪽과 동쪽 한계선으로 정했다. 또 양쪽 연안으로부터 35해리 떨어진 다각형 모양의 중간수역을 설정해 두나라 어민들이 모두 조업을 할 수 있도록 합의했다. 그러나 새 어업협정으로 고급어종이 풍부한 훗카이도 근해의 어장을 잃게 된데다 쌍끌이 어선의 조업등이 누락된 것이 드러나 타격을 입게 된 어민들의 항의가 끊이질 않았다. 당시 김선일 해수부 장관은 여섯달 뒤인 1999년 3월 추가협상을 마무리한 뒤 사임했다.

1953년 9월 26일 "정부-국회출입기자 체육대회"
정부와 국회 양측 출입기자들이 친목을 다지기 위해 축구시합을 벌였다. 유니폼까지 맞춰입은 양측 선수들은 운동장을 누비면서 열심히 공을 따라 다녔다. 오랜만에 하는 운동이라 쉽지 않았지만 기자들은 축구시합을 통해 협동심과 우의를 다졌다. 다음은 국회의원과 국무위원간 발리경기가 이어졌다. 마음만은 앞서지만 동작이 따르지 못하는 진기한 플레이도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일류선수 못지 않은 멋진 플레이가 자주 연출됐다. 장관과 선량들은 복잡한 격무를 잊어버리고 경기에 열중함으로써 이날 모임의 의미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950년 9월 28일 "UN군 서울 탈환"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했다. 북한군에 서울이 함락된 뒤 석달만이다. 서울 수복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청에서 수도 탈환식이 거행됐다. 승리를 기원하는 맥아더 사령관의 축하연설이 끝난 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남한은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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