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노동자 전태일 분신
1970년 노동자 전태일 분신
  • 공문룡 칼럼니스트
  • 입력 2003-11-13 09:00
  • 승인 2003.11.13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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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11일 "이리, 화물열차 폭발"
전라북도 이리시 이리역에서 폭약을 실은 화물열차 한량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이 폭발로 이리역 반경 10㎞가 페허로 변해 56명이 목숨을 잃고 1,500여명이 다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 사고열차는 인천에서 화약을 싣고 광주로 가던 길이었다. 사고는 화약후송원이 촛불을 켜놓고 잠들었다가 촛불이 화약이 담긴 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일어났다.

1983년 11월 12일 "레이건 대통령 한국 방문 "
레이건 미국대통령 내외가 우리나라를 공식방문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성숙된 동반자관계를 더욱 다지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이 공식방한 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성숙된 동반자관계를 도착성명에서 “우리는 전쟁시에 함께 싸웠던 것처럼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지금도 함께 대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레이건의 방한은 한미 방위공약을 재확인함으로써 북한의 안보위협을 상당부분 완화시켰다.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 전태일 분신"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노동자 전태일이 평화시장 앞길에서 온 몸에 기름을 뿌리고 분신자살했다. 당시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전태일의 분신사건은 우리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1960년대 이후 고속성장을 거듭해온 우리 경제.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에 비판이 가해지고 분배의 문제가 제기됐다. 전태일이 분신하고 열흘 뒤 서울 평화시장에는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됐다. 노동문제가 신문과 잡지 등 매스컴에서 주요한 소재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학업을 포기하고 직접 노동현장에 뛰어드는 학생들도 생겨났다. 또한 노동자들의 노조활동은 더욱 격렬해져 정부 사용자측과 긴장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1991년 11월14일 "남아공 평화협정 조인 "
흑인에 대한 백인정권의 차별정책으로 인종분쟁이 끊이지 않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백지도자들은 유혈 정치분규를 끝내기 위한 평화협정에 조인했다.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 민족회의 의장과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 그리고 망고 수투 부델레지 인카르타 자유당 지도자 등 세 사람이 평화협정 조인의 주인공이다. 협정문에는 선동적 언동의 금지 정치폭력문제를 다루기 위한 특별법원의 설치 등이 규정돼 있다.

1974년 11월 15일 "북한 제 1호 땅굴발견 "
아침 7시 35분. 경기도 연천군 백한면 고량포에서 북한이 파내려온 땅굴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육군 25사단 소속 구정섭 중사 등 여덟명의 수색조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발견한 북한의 땅굴. 땅굴은 폭 91㎝, 높이 1.2m 규모로 남방한계선 1,200m까지 뚫려있다. 군사전문가들은 이 땅굴이 연대 병력을 한시간안에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라고 발표했다. 국방부는 북한의 땅굴이 다른 곳에도 더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하고 땅굴수색작업을 실시했다.북한의 땅굴은 이후 1975년과 1978년 그리고 1990년 각각 철원과 판문점 그리고 양구에서 발견돼 지금까지 모두 네곳이 발표됐다.

1950년 11월 16일 "유엔군, 중국 반격 "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고 9일이 지난 이날 유엔군은 북한과 중공군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유엔군의 우세한 화력에 인해전술로 맞선 중공군은 기상악까지 겹쳐 공군의 지원을 받지 못해 점차 후퇴를 하게 됐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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