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은 과거 이곳에 있던 경무대의 이름을 따서 구 본관을 집무실 겸 관사로 사용했다. 1960년 4·19혁명 후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국민의 인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경무대를 ‘청와대’로 개칭했고, 그후 박정희·최규하·전두환 전대통령이 사용했고, 현재의 청와대 본관은 1989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22명의 전문가로 자문위원회를 구성, 의견을 수렴한 뒤 91년 9월 신축했다. 청와대는 행정구역상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속한다. 청와대 일대는 예로부터 풍수지리상으로 길지 중의 길지에 속한다고 알려져 왔다. 북으로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인 낙산, 우백호인 인왕산, 안산인 남산이 있다. 또 명당수인 청계천이 북북서에서 동쪽으로 흘러가고, 객수인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매우 길한 배산임수의 형상을 하고 있다.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국회 증언
제13대 국회가 개원하자 야권의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은 3당 공조체제를 형성하여 여러 면에서 노태우정권에 압박을 가했다. 1988년 5월 22일 야권의 3김씨는 국회내에 5공특위 등의 5개특위를 두기로 합의하여 6월 27일에는 특위가 구성되었다. 이들 특위는 국회에서의 청문회 활동을 통해 5공화국 당시 정부·여당이 저지른 과오를 질책하면서 5공비리청산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국회청문회활동을 통해 5공시절의 비리가 밝혀지기 시작하자 전두환 전대통령 부부는 11월 23일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고 설악산의 백담사에서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1989년 12월 여·야의 지도자들이 회동하여 5공청산의 연내종결을 합의함에 따라 전두환 전대통령의 국회에서의 증언을 계기로 12월 31일 불완전하게나마 일단 매듭지어졌다.
1988년 1월 1일 김일성 신년사에서 남북연석회의, 올림픽 공동주최 등 제안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88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쌍방의 당국자를 포함한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들과 각계 인사들이 참가하는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하고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다국적 군축회담, 제24회 서울올림픽 공동주최, 상호비방 중지문제 등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1562(명종 17)년. 1월 3일 임꺽정 처형
<명종실록>에 의하면 임꺽정은 명종 14년(1559)부터 시작해 체포되어 처형당한 명종 17년(1562)까지 3년 이상 항해도를 중심으로 평안·경기·강원지역에서 활약했던 조선의 대표적인 도적 우두머리였다.당시 사회는 온통 부패로 얼룩졌고 백성은 학정과 수탈에 시달리며 고통을 호소해야 했다. 여기에다 몇 년째 흉년이 계속되어 거지가 늘어나고 도적떼가 할거하였으며, 남쪽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민가를 불지르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임꺽정은 이러한 아수라장 같은 시대상황을 이용해 자신의 처지를 타개하려는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임꺽정은 처음에 도당 몇 명과 민가를 돌아다니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하여 구월산 등지에 본거지를 두고 주변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황해도 일대의 관아를 습격하여 창고를 털어 백성에게 나눠주는 의적으로 둔갑했다.
1950년 1월 5일 독립신문 창간한 서재필 세상 떠남
1866년 10월 28일 전남 보성에서 태어남. 1884년 15명의 젊은이와 함께 일본에 가 근대병술 배우고 돌아와 교관이 됨. 갑신정변 때 병조참판이 되었으나 3일만에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함. 미국 워싱턴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세균학) 받음. 1896년 4월 7일 최초의 순한글판 독립신문 발행. 1896년 7월 20일 민족의식 일깨우고 자주독립사상 불러일으키고자 독립협회 만듦.
공문룡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