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월남에 국군 2,000명 파병 결정
1965년 월남에 국군 2,000명 파병 결정
  • 공문룡 칼럼니스트
  • 입력 2004-01-15 09:00
  • 승인 2004.01.15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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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월 7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자유선언(반파시즘 선언) 발표
1921년 39세에 갑자기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루스벨트는 굳은 의지로 병을 이겨나갔다. 1932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공황으로 허덕이던 미국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뉴 딜 정책’을 폈다. 1941년 1월 6일 반파시즘을 선언하고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국제연합 결성에 힘썼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네 번이나 뽑혔다.

1949년 1월 7일 이승만 대통령, 일본에 대마도 반환 요구
1949년 1월 7일 이승만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는 건국직후인 1948년 8월에 대마도 반환 요구를 한후 일본측에서 물의가 일자 9월에 다시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후에도 거듭 대마도 반환 요구를 하였으나 일본측의 항의와 당시 미국의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거부됐다.

1965년 1월 8일 국무회의, 월남에 국군 2,000명 파병 결정(1월 26일 국회 동의)
월남전 파병은 1964년 1월 한국정부가 한국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월남정부의 서한을 수락하는 형식을 취하였다.당초 비전투병 파병이 주를 이루었으나 다음해인 1965년 정부와 국방부는 미국과 월남의 2차 파병 요청에 따라 협의, 1월 7일 국무회의서 전투병 추가파병을 결정했고 같은 달 26일 국회동의를 거쳐 2,000여명을 파병했다.이후 주월한국군 사령부 창설과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십자성부대, 백구부대, 은마부대 등 한국군 전투부대의 월남전파병 인력은 1964년 7월 18일 파리평화협정에 따라 1973년 3월 23일 철수 할 때까지 8년 8개월에 걸쳐 연인원 31만2,853명에 이른다.그 기간 중 국군은 사살 4만1,462명, 포로 4,633명, 귀순 2,483명 등의 전과를 올렸으나 국군도 사망 5,077명(전사:4,597, 순직:277, 기타 사망:293) 전상자 1만962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1969년 1월 9일 문교부, 남자 고교생 및 대학생에 군사훈련 실시키로 결정
1968년 1월21일 밤 휴전선을 넘어 청와대로 진격하다가 남쪽 군인·경찰에 진압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무장게릴라 31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던 김신조씨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목을 따러왔다”고 말했다. 이 발언을 계기로 사회 전체가 반북 분위기로 똘똘 뭉쳐졌고, 박정희 정권은 ‘전사회의 병영화’를 위한 토대를 닦기 시작했다. 결국 ‘향토예비군’이 창설됐고, 다음해인 1969년 1월 9일 문교부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키로 결정, ‘교련’ 시간이 생겨났다.

1950년 1월 10일 애치슨 라인 발표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태평양방위선으로 한국을 배제하고 알래스카-일본 오키나와-대만-필리핀으로 함으로써 애치슨 라인의 발표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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