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망명 신청 67일만에 김덕홍 전 조선여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과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황장엽은 학자출신으로 북한 고위 당료직을 두루 거친 북한 정치인. 그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72년 5기 최고인민회의의장 겸 상설회의 의장이 되면서부터. 이때부터 그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해 이른바 김일성주의로 발전시키는 학문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또 김일성 우상화를 제3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 주체사상 연구소를 설립하고 그 연구활동을 지원독려하는 대외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황장엽은 지난 97년 2월 중국 베이징(북경)소재 주중 한국총영사관을 찾아 한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했다. 그리고 망명신청 67일만인 4월 20일 에어 필리핀 특별기편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남북간의 극한대립을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고 망명동기를 밝혔다. 황장엽이 한국에 망명하자, 북한에 남아 있는 황장엽의 친인척 100여명이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1870년 4월 22일 러시아 혁명가 레닌 탄생
러시아 혁명가 레닌이 1870년 4월 22일 태어났다. 그는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정권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치가. 특히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후진국 러시아에 적용함으로써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이자 사상가이다.레닌은 1887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계획에 참여하여 처형된 맏형 알렉산드르의 영향으로 혁명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변신한 그는 이후 혁명운동에 투신하여 체포와 유형의 세월을 거친 뒤 1900년 국외로 망명, 1903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에서 당원 자격문제로 마르토프와 맞서 직업혁명가주의를 관철시킴으로써 볼셰비키(다수파)가 되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직후 일단 귀국하였으나, 1907년 다시 망명하여 주로 스위스에 머물면서 연구와 저술에 종사하다가, 1917년 2월혁명 직후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로 귀국하였다. 같은 해 11월 7일 무장봉기로 과도정부를 전복하고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혁명정권을 수립한 다음, 러시아의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하여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인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1924년 사망했다.
1996 4월 24일 강원도 고성에 최악의 산불
96년 4월 24일 강원도 고성에서 최악의 산불이 발생했다. 고성 산불은 육군 모부대 폭발물 처리반이 노후된 TNT를 처리하던중 유탄이 숲속에 떨어지며 불씨가 옮겨붙으면서 발생했다. 그리고 강풍을 타고 인근 야산으로 번진 것이 원인이다.우리나라에서는 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산불발생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외국의 경우와 달리 인구가 많은 생활근거지와 가까운 곳에서 산불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한편 당시 고성산불로 인해 이재민 50가구 142명, 주택 96채, 창고 76채, 축사 등 피해가 막심했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강경대 열사 사망 사건 발생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고 강경대 열사가 시위도중 경찰의 폭행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등록금 투쟁을 벌이다 전격 구속된 명지대 총학생회장 석방 요구 시위에서 대학 교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충돌하면서 사복체포조인 백골단에 붙잡혀 집단구타당한 뒤 동료학생들이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한 것이다. 그의 사망이후 학생·시민단체 등에서는‘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책임자 처벌을 위한 결의대회’를 열며 당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이 과정에서 전남대생이 분신자살하는 등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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