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필화’로 구속된 시인 김지하
1970년 ‘필화’로 구속된 시인 김지하
  • 공문룡 칼럼니스트
  • 입력 2004-06-08 09:00
  • 승인 2004.06.08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70년 6월 2일 "‘오적’ 필화사건, 김지하 구속"

1970년 6월 2일 ‘오적’의 작가 김지하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김씨는 이해 5월 ‘사상계’에 담시(譚詩) 「오적」을 발표, 한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당시는 3선개헌 반대파동으로 혼란의 시기로 군사독재와 이에 대항하는 세력간에 첨예한 마찰이 고조되고 있었다. 3선개헌으로 장기 집권의 걸림돌을 제거한 박정희 정권은 비판세력에 대한 탄압과 금제에 치중한다. 특히 저항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론에 대한 감시의 눈길은 삼엄해진다. 이런 시점에서 ‘사상계’는 김지하의 저항적 풍자시 「오적」을 실은 것. 그리고 ‘오적’은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반공법에 연루됐다. 원래‘오적’이 ‘사상계’에 발표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시판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원만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시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6월 1일자에 실리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다음날인 6월 2일 새벽 1시 50분쯤 수사당국 요원들에 의해 ‘민주전선’ 10만부가 압수되고, 김지하를 비롯하여 ‘사상계’의 대표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 등이 구속됐다.

1964년 6월 3일 "6·3 사태"

1964년 6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속되는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조치였다.이 해 3월말부터 전국 대학가 등에서는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됐다. 이 시위는 3월 30일 11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이 박정희를 면담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함으로써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4월 19일을 전후하여 학생시위는 재발되었다. 그리고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에 박정희는 오후 8시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병력을 서울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 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정시켰다.

1966년 6월 4일 "장면 전 국무총리 별세"

제 2공화국의 실권자였던 장면 전국무총리가 66년 6월 4일 사망했다.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장면은 지난 1949년 초대 주미한국대사가 되어 한미국교를 위하여 공헌했다. 또 6·25전쟁 때는 주미대사로 있으면서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1951년 국무총리가 됐다. 이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1955년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조직, 최고위원이 되고 1956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6년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을 당하였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 1960년 조병옥씨와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했다. 4·19혁명 후 제5대 민의원을 거쳐 내각책임제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실각했다.

1990년 6월 7일 "시인 모윤숙 별세"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인 모윤숙씨가 90년 6월 7일 사망했다.모윤숙씨는 190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지금의 이화여대를 졸업, 배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고 잡지사 ‘삼천리’에서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대표적 저서로는 ‘렌의 애가’, ‘모윤숙 전집’, ‘논개’등이 있다.하지만 일제시대 친일활동을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입단을 시작으로, ‘지원병에게’, ‘동방의 여인들’, ‘여성도 전사다’ 등 일제를 찬양하는 작품을 썼다는 것이다. 광복 후 모윤숙씨는 문단과 정계에서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1958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 총회 한국대표, 아시아 여성단체연합총회 한국대표, 1960년 펜클럽 한국위원장, 1962년 여성단체협의회 이사, 1968년 한·인도 협회 부회장, 1969년 여류문인협회장, 1970년 서울 국제펜클럽대회 준비위원장을 역임했다. 1971년 8대국회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대표로 당선되기도 했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