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육영수 여사, 문세광에 피격
1974년 육영수 여사, 문세광에 피격
  • 공문룡 칼럼니스트
  • 입력 2004-08-18 09:00
  • 승인 2004.08.1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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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8월 11일 "농학박사 우장춘 박사 별세"

농학자인 우장춘 박사가 59년 8월 11일 사망했다. 아버지는 한국인,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던 우 박사는 1950년 전까지는 일본에서 활동했다. 1919년 도쿄제국대학실과의 농학과를 졸업했다. 1930년 겹꽃 피튜니아꽃의 육종합성에 성공,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였고, ‘종의 합성설’로 1936년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 정부의 초청을 받고 귀국하여 한국농업연구소장에 취임했다. 당시 우 박사는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할만큼 했다. 이제 남은 삶을 아버지의 나라에 바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1952년 농업재건 임시위원회위원, 이듬해 임시농업지도요원 양성소 부소장, 중앙원예기술원원장을 역임했다.이 기간동안 김장감을 대량 생산하도록 배추를 개량하고, 씨없는 수박을 만들어 냈으며, 한 해에 두번갈이 벼농사를 연구하다 쓰러져 병석에서 문화훈장을 받았다.저서로는 ‘십자화과의 게놈 분석과 유채의 합성’이 있다.

1980년 8월 11일 "조오련 대한해협횡단에 성공"

1980년 8월 11일 ‘아시아 물개’조오련이 부산-대마도간 53㎞의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횡단했다. 조오련은 1980년 이날 새벽 0시5분 부산 다대포 방파제를 출발, 13시간16분10초동안 수영한 끝에 이날 오후 1시21분10초 대마도 서북방 소자끼 등대에 도착했다. 지난 1972년 7월 31일 일본의 나카지마와 1973년 5월 우리나라 박홍석이 대한해협 횡단에 각각 도전하였으나 실패한 바 있었다. 한편 조오련은 1970년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2관왕을 차지한 바 있다. 그는 이 대회에 출전하여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각각 4분 20초 2, 17 분 25초 7을 기록,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 2개의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 실시"

1993년 8월 12일 오후 8시를 기해 금융실명제가 전격실시됐다. 김영삼 대통령이 이날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 재정명령’을 발표한 것이다.금융실명제는 금융기관과 거래를 함에 있어 가명이나 차명이 아닌 본인의 실지명의, 즉 실명으로 거래해야 하는 제도다. 금융거래의 정상화와 합리적 과세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인 것. 은행예금이나 증권투자 등 금융거래를 할 때 실제 명의로 하여야 하며 가명이나 무기명거래는 인정하지 않는 다. 이 제도는 사금융 등 음성적인 금융거래를 막는 데 그 목적이 있다.1982년 ‘장영자 이철희 사건’이라는 대형 금융사고가 발생했을 때 금융실명제가 처음으로 논의됐다. 그리고 1983년 ‘7·3조치’로 금융실명제의 실시방법이 공식적으로 거론된 이후 많은 논의와 시행착오의 과정을 밟아 왔다.

1974 8월 15일 "육영수 여사 사망 "

1974년 이날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하여 서거했다. 육 여사는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국립중앙극장 단상에서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한 것이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집행됐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충청북도 옥천 출생인 육여사는 1942년 배화여고를 졸업, 옥천여중 교사를 지냈다. 1950년 육군 중령 박정희와 결혼하였다. 육 여사는 생전에 각종 사회 ·육영사업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자선봉사단체인 양지회를 결성했고 전국 9개소에 여성회관을 건립했다. 헌혈운동 등 적십자사 활동에도 솔선 ·참여했다.육영사업 일환으로 어린이대공원 ·어린이회관 건립을 주도하고, 소년소녀 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했다.

공문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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