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둘러싼 소문 진실은 이렇다”
임채진 전 검찰총장은 6월 3일 오전 사직서를 제출했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총지휘하며 적지 않는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라는 추측이 곳곳에서 쏟아졌다. 앞서 임 전 총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5월 23일에도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김경한 법무부 장관이 “사태 수습과 사건 수사 마무리가 우선”이라는 이유로 사직서를 돌려보낸 바 있다. 임 전 총장이 강력하게 사의를 표명하자 검찰은 크게 술렁였다. 하지만 임 전 총장은 뜻을 꺾지 않았다. 모든 허물을 혼자 지고 떠나겠다는 심정으로 임 전 총장은 검찰을 떠났다. 임 전 총장이 검찰을 떠난 이후 검찰은 신임 총장 선임을 놓고 또 다시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세간의 관심은 떠난 이 보다 새로 등극하는 이에 쏠렸다. 그 사이 임 전 총장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임 전 총장으로부터 박연차 수사에 대한 비화를 직접 들어 보았다. 임 전 총장은 사직서를 제출한 직후 ‘사퇴의 변’을 통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상할 수 없는 변고로 인해 많은 국민을 슬프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번 사건 수사를 총지휘한 검찰총장으로서 진심으로 국민께 사죄드린다”고 밝혔다. 검찰 수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검찰에 쏟아지는 모든 비난을 혼자 짊어지고 가겠다는 뜻이었다.
또 임 전 총장은 “원칙과 정도, 절제와 품격을 갖춘 바른 수사, 정치적 편파 논란이 없는 공정한 수사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한 단계 높이려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며 “이번 사태로 인한 인간적인 고뇌로 평상심을 유지하기 힘든 내가 검찰을 계속 지휘한다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사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를 두고 일선 검사들은 “책임론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검찰의 짐을 덜어주고자 결심을 한 것”이라며 임 전 총장의 퇴진을 안타까워했다. 반면 일부 검사들은 ‘임 총장의 사퇴가 검찰 책임론에 대해 긍정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수사를 마무리 하는 것이 총장의 임무인데 사퇴를 한 것은 임무를 방기한 것’이라며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 자살 후폭풍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검찰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태가 터짐과 동시에 검찰에 수많은 돌팔매가 날아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살 직전까지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측근비리를 캐기 위해 저인망식 수사를 펼쳤다. 보수언론은 검찰 수사를 응원했지만,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검찰수사를 가리켜 일명 ‘싹쓸이 수사’라고 불렀다. 측근들에 대한 수사가 그만큼 철저하게 이뤄졌다는 소리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노 전 대통령 자살에 대한 책임은 자연 검찰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리한 수사에 대한 검찰 지휘부의 책임론이 제기되는가하면 일각에서는 수사팀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장기간에 걸쳐 사방에서 진행됐다. 조금이라도 연관된 측근이 있으면 철저히 조사했다. 지난해 11월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인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측근 그룹인 이광재 민주당 의원과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 노 전 대통령 주변에 대해 전방위 수사를 벌였다. 수사 대상에는 부인과 아들, 딸, 사위, 조카사위, 처남까지 포함됐다.
수사는 박 회장의 자백으로 급물살을 타는 듯 보였다. 박 전 회장은 노 전 대통령에 금품을 줬다고 자백했고 노 전 대통령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둘러싼 여론의 시각은 양분됐다.
보수언론은 검찰이 더 강하게 수사를 해야 한다고 부추겼고 진보언론은 검찰 수사가 정치보복성향이 짙은 표적 수사라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박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에 자살사건이 터지자 그동안 검찰편에 서있던 모든 동조세력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들은 거대한 쓰나미를 피하기 위해 검찰의 반대편에 서서 검찰수사를 비난했다.
임 전 총장의 퇴진은 이런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일선 검사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총장이 바뀌면 검찰은 분위기 쇄신을 통해 거듭나겠지만 십자가를 지고 나간 임 전 총장은 퇴임 후에도 편치 않을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임 전 총장 “자유인 되고 싶다“
총장이 된 이후 임 전 총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무난하게 잘 해냈다는 평도 있지만 정권의 눈치를 살피느라 제대로 역할을 못해냈다는 의견도 많다.
검찰총장 퇴임 후 그의 행보에 세인의 이목이 집중됐다. 대형로펌이나 대기업 행, 아니면 변호사 개업 등 추측이 분분했다.
최근 대기업 A사로부터 연봉 5억원 선인 상임고문에 내정됐다는 소문이 일었다. 상임고문은 부사장급으로 알려져 있다. 부사장급 자리에 오르면 기사, 차량 제공은 물론 비서까지 두게 된다.
소문에 대한 확인 작업이 야권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아직 정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임 전 총장에 직접 물어 봤다. 임 전 총장은 지난 3일 [일요서울]과의 전화 통화에서 “사실 무근이며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다”고 말했다.
임 전 총장은 “요즘 나에 대해 이런 저런 소문들이 돌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만 나온다”며 “그러면 지금 이제 막 사무실 개업한 나보고 변호사 하지 말란 소리 아닌가”라고 농을 던졌다.
또 임 전 총장은 “검찰을 떠날 때도 온갖 소리 다 들으며 나왔다. 그리고 나온 직후 수사지휘 논란으로 내내 시달리며 살았다. 이제 좀 가만 내버려두면 안되겠나. 이젠 더 이상 외부에 노출되고 싶지 않다”며 지난날이 힘겨웠음을 암시했다.
A기업에도 이 같은 소문 내용을 확인해 봤다. A기업도 임 전 총장과 같은 반응이었다.
A기업의 한 관계자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소문이 나도는데다 여기저기서 문의도 많아 확인해 봤더니 전혀 사실 무근이었다”며 “어떻게 그런 소문이 나오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일단 우리쪽에선 그런 계획이 전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한편 임 전 총장은 현재 강남의 모처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근황에 대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하고 가족들과 시간도 보내면서 나름대로 바쁘게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잊고 이제 내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임채진 전 총장 ‘수사지휘권 논란’을 말하다
임채진 전 총장은 과거 수사지휘 논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임 전 총장은 “총장 자리에서 물러날 때 너무 힘들었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언론이었다”고 말했다.
임 전 총장에 따르면 당시 수사지휘권 헤프닝은 언론이 흥미위주의 보도를 위해 만들어낸 말이라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면 기자회견 때 박연차 게이트 수사관련, 기자로부터 수사지휘를 받은 적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때 임 전 총장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 생각하고 장난스럽게 옆에 있는 검사에게 “우리가 수사지휘를 받은 적 있나?”라고 물었고 그 검사는 웃으며 “그냥 노코멘트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와전돼 수사지휘 논란을 낳은 것이라고 임 전 총장은 설명했다.
임 전 총장은 “아니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 상황이 가볍게 농담하며 넘어가는 대화라는 것을 알텐데 기자들이 그렇게 말을 와전하는 것을 보고 정말 세상이 무섭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임 전 총장은 아직도 불편한 기분이 남아 있는 듯 “그 일로 너무 속 고생을 했다. 왜 있지도 않은 사실을 그렇게 만들어 내서 사람을 힘들게 하나. 그때 기자들에 너무 실망해서 이제 더 이상 만나지 않으려 한다”고 한숨을 내 쉬었다.
또 임 전 총장은 특유의 강경한 어투로 “검찰은 원칙과 정도에 따라 수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수사는 권한과 책임으로 하는 것이지 외압에 흔들리면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살아 본 적 없다. 검찰 수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말들 때문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임 전 총장은 자신을 둘러싼 최근의 소문들에 대해 “왜 떠난 사람을 붙잡고 이렇게 못살게 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임채진 전 총장의 과거 모습
진보진영에선 박연차 게이트 검찰수사를 두고 “검찰을 앞세운 권력의 음모”라고 규정짓고 있다. 그리고 임채진 전 총장에 대해서는 검찰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한 인물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임 전 총장을 아는 검사들은 임 전 총장을 원칙에 철저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이를 반영하듯 그가 취임이후 내세운 것도 ‘원칙과 정도’ ‘절제와 품격’이었다.
임 전 총장은 평소 수사의 외압이나 정치적 편향논란을 무척이나 경계해 왔다. 검찰권을 남용한다는 지적에도 민감했던 게 사실이다. 지난 2004년 임 전 총장은 춘천지검장으로 재직할 당시 청와대 비서관으로 철원-화천-인제-양구 지역구에 출마한 열린우리당의 정만호 후보를 구속기소했다. 선거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선거연락사무소를 열기 위해 지역책임자를 선정하고 선거자금을 준 혐의였다. 반면 다른 지역구에 출마한 야당 후보는 몇몇 혐의가 고발됐지만 별다른 문제없이 넘어갔다. 이런 점을 놓고 보면 임 전 총장은 여당에 가혹한 반면 야당에는 관대했다. 세간의 비난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1991년 성균관대 김귀정 씨 사망사건 때도 임 전 총장은 권력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경찰은 사망한 김씨의 죽음을 지병탓으로 돌리려 했지만 당시 평검사였던 임 전 총장은 부검결과가 나오자 ‘강경진압이 사망원인’이라고 발표하며 원칙과 정도를 지켰다.
[윤지환 기자] jjh@dailysun.co.kr
윤지환 기자 jjh@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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