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특사 조문단 파견은 일종의 정치쇼 북-미 양자협상 결론

남북한은 그동안 금강산 관광객 총격, 개성공단 근로자 억류, 핵실험, 로켓발사 등 사건이 잇따르면서 서로 냉랭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이 북한을 방문 한 이후 모든 상황이 눈 녹듯 풀어지고 있다. 남북관계가 예전 평화교류가 한창이던 때와 유사한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일부 북한전문가들은 “남한이 또다시 북한의 치밀한 정치쇼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라며 경고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남한과의 관계를 이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선 또 다시 남한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빈소를 찾은 북측 조문단은 지난달 23일 이명박 대통령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면담 직후 청와대는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고 남북교류협력에 대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이뤄졌다고만 밝혔다.
청와대의 이 같은 설명에도 김 위원장의 ‘메시지’ 내용을 둘러싼 논란이 가시지 않고 있다. 면담 다음날인 24일 일부 언론이 김 위원장의 메시지에 ‘남북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청와대는 이날 외교안보수석실 명의의 해명자료를 내고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가 있었을 뿐 정상회담 관련 사항은 일절 거론된 바 없다”고 반박했다. 다만 조문단과 남측 관계자들의 면담에선 이 같은 언급이 오갔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문단과 지난 22일 조찬 회동을 했던 무소속 정동영 의원은 “정상회담 제의는 내가 했다”며 “주로 개성공단 이야기를 했고, 구체적으로 정상회담과 관련된 제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김덕룡 대통령국민통합특보도 “북측 조문단이 조찬회동에서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려면 두 정상이 만날 필요가 있다’는데 동의한 것으로 알지만 이것이 김 위원장의 메시지인지는 모르겠고, 또 이 대통령에게 전달됐는지도 알 수 없다”고 밝혔다.
北 갑작스런 변화 왜?
북한 조문단의 청와대 면담이 왜 정상회담 추진설을 낳게 된 것일까. 미국은 활발한 물밑접촉을 통해 북한과 상당한 협의를 진전시켰으며, 미국문제를 해결한 북한은 이제 남한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경협을 모색할 단계라고 외교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오바마 특사자격으로 방북해 모종의 협상을 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의 물밑 접촉이 클린턴으로 인해 마침표를 찍었다고 외신들은 보고 있다. 이는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안에 따라 남한에 손을 뻗을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케 한다.
북한은 ‘협상은 미국과 벌이고 협력은 남한과 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외교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핵문제와 관련, 북한은 남한과 협상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남한이 북핵 포기를 조건으로 내놓을 수 있는 선물이 너무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남한이 북한에 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공장시설 등 건설지원과 식량난 해결을 위한 곡식지원이 전부다. 반면 미국은 북한을 국제사회의 반석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힘이 있다. 때문에 남한과의 경제협력은 국제사회에서 안정된 위치를 확보한 뒤에 해도 늦지 않다고 북한이 판단했을 수도 있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미국은 클린턴을 통해 북한에 두 개의 큰 선물보따리를 안긴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이 북한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큰 선물은 중국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아도 될 정도의 대북 경제지원 및 협력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미국 내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되 단기적으로는 북한에 핵보유국과 비핵국가 사이의 중간 지위를 허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조지메이슨대학의 휴 거스터슨 교수가 ‘핵과학자협회지' 최근호에 기고한 논문에서 주장했다고 지난달 27일 전했다.
거스터슨 교수는 “미국 정부의 공식목표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이지만 현재 오바마 행정부내에서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하리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방안이 더더욱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전 미 국무부 한국과장은 “미국 행정부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일축했으나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이달 초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의 핵프로그램의 완벽한 폐기보다는 핵기술의 확산을 막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보도했었다고 RFA는 지적했다.
청와대 꼭두각시 될 수도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고 이산가족상봉에 합의하는 등 남북한에 평화기류가 퍼지고 있는 가운데 북한 정부 인사 4명이 지난달 중순 미국을 비밀리에 방문한 것으로 같은달 27일 알려져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들의 방문은 조(북).미 민간교류협회(KAPES) 대표단이라는 민간 차원의 방미 형식으로 지난달 15~19일 이뤄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방미 대표단에는 최일 조미 민간교류협회 부회장과 협회소속 고위 관료, 통역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관계자도 이들의 방미 일정에 합류한 것으로 전해졌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핵실험 이후 북한 인사들의 미국 방문을 처음 허용한 것이다. 이를 두고 북미관계 개선의 신호탄이라는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구체적인 방미 목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북 식량지원 재개 등의 문제가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이 경제협력 우선 대상국을 남한이 아닌 미국으로 재설정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특히 김 국방위원장이 경제전선 강화를 계속 강조하고 있는 시점에서 미국과 활발하게 접촉하고 있는 것은 이 추측에 무게를 싣고 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오는 2012년 강성대국 달성을 위한 “주공전선은 경제전선"이라며 “모든 부문에서 최고 생산년도 수준을 강행돌파하고 선군시대의 새로운 기록, 새로운 속도를 창조"할 것을 주문했다고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이 지난달 27일 전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6월 25일 당.군.국가경제기관의 간부들을 모아놓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국방공업을 최우선시"할 것을 강조했다. 이어 금속, 전력, 석탄공업과 철도운수 등 “인민경제의 선행부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 4대부문중에서도 “급선무로 나서는 것은 금속공업 부문을 치켜세우는 것"이라고 제시했다고 중앙방송은 소개했다.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정부가 자체적인 대북외교력을 갖추지 않으면 향후 북미관계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 성립여부에 따라 남북관계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철저하게 남한을 배제한 체 미국과 직접대화를 원하고 있어 남북문제의 당사자임에도 미국의 대북협상 결정에 따라가야 하는 입장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북한이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미국과 직접 협상?협력안을 마련하고 남한은 무조건 요구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미회담 결과에 따라 남한이 미국측 요구와 북한측 요구를 모두 따라야 하는 부담을 안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측이 북한과 협의한 지원안과 북한이 따로 요구하는 경협지원을 동시에 추진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역시 남북한의 분위기 보다 미국과 북한의 대화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달려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미국의 움직임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북한 소식에 정통한 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에 아직 소극적이며 회담을 위해선 미국과의 모든 약속이 먼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소식통은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우선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남한의 국제적 영향력이 약할 뿐 아니라 남한이 철저하게 미국의 통제아래 움직이고 있어서다”라며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가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북한과의 대화에서 주도권을 잡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이 대미 대남 정책 전문가를 중용해 눈길을 끌고 있다. 북한이 남한, 미국, 중국 등 주변국과 대화의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북한의 ‘협상전문가'가 수면위로 다시 등장해 눈길을 끈다.
‘특사 조문단'으로 파견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비롯해 원동연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실장, 맹경일 아태위 참사, 리 현 아태위 참사 등은 북한의 대표적인 남북회담 일꾼이다. 이 네 사람은 북한의 대남전략과 회담을 지휘하는 ‘참모부'로 대남분야 실세로 꼽힌다.
[윤지환 기자] jjh@dailysun.co.kr
윤지환 기자 jjh@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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